국가정보원 대선개입사건 항소심 재판부의 결론은 '국정원법도, 공직선거법도 유죄'였다.
그런데 지난 9일 선고공판에서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형사법원)는 상세하게 원세훈 전 원장과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의 양형 사유를 설명했다. 보통 유리한 요소와 불리한 요소로 나눠 알려주는 것과 다른 방식이었다.
김상환 부장판사는 14분간 법원이 왜 이 사건의 사이버 활동을 처벌해야 하는지, 이 재판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목조목 짚었다. <오마이뉴스>는 A4 6쪽에 걸친 양형사유 가운데 주요부분을 발췌해 소개한다.
"국정원, 국민의 생각을 심리전 대상으로 삼아"
"국가기관이 사회적 공론이 벌어지는 사이버 광장에 직접 개입하여 마치 익명의 국민인양 사회적 쟁점, 특히 선거쟁점에 관한 의견 등을 조직적으로 전파함으로써, 그러한 형태의 국가권력의 개입을 전혀 상정하지 못한 채 사이버공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과 감상을 개진하고 다른 관점과 자유롭게 토론하고 논쟁했던 국민들은 이제 사이버 공론장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의심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이로써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이 단지 국가권력의 일방적 선전으로 치부될 가능성을 우려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아가 국민의 활발한 정치 참여 및 표현이 혹여나 위축되어 사이버공간에서의 적극적 소통이 가진 긍정적 효과가 줄어들지도 모르게 되었다.
논어의 <위정>편에서 공자는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하여 공격한다면 이것은 손해가 될 뿐'(功乎異端 斯害也已)이라고 하였다. 나와 다른 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배척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의미이고, 이단에 대한 공격과 강요가 결국 심각한 갈등과 분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경고이다.
누구보다 이를 지켜야 할 국가기관임에도, 우리 헌법에 의하여 보장된 정치적 기본권의 범위 안에 있는 국민의 생각과 의견을 심리전 대상으로 삼을 가능성을 무릅쓰고 이를 강행함으로써 바로 앞서 언급한 부정적인 결과와 우려를 가져온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훼손 명백... 예외 없다"
(중략) 여러 사정들에 비추어 이 사건 사이버 활동은 본연의 심리전 활동의 범주를 벗어나 공직선거법 등을 위반한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한 활동이었다고는 하나 정작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훼손한 것임이 명백하다.
피고인들은 재판과정에서 줄곧 이 사건 사이버 활동에 대한 자신들의 주관적 또는 자의적인 평가만을 거듭 강조하고 있을 뿐 객관적 성찰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심리전에 대응한 적절한 조치를 강구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헌법 및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조치의 내용과 방법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 그 누구도 법의 구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어떠한 국가기관도 법치의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내세운 명분의 정당함이 그에 따른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안보환경이 급변하여 이에 대응할 절박한 필요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고자 하는 활동이 현재의 법체계에서 허용될 수 없다면 국민의 지지를 얻어 새로운 활동 근거에 대한 국회의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보수·진보를 떠나... 선거의 공정성 해치면 엄단해야"
(중략) 기왕 드러난 국정원의 불법적 활동에 대하여는 엄정하게 단죄함으로써 이를 국정원의 자기 점검 및 통제의 계기로 삼도록 할 필요가 더욱 강하게 요구된다.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1999년 이후 국가정보기관의 선거 개입 의혹이 사회적으로 커다란 논란이 되거나 사실로 확인된 경우가 거의 없어 국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축적되어 가고 있던 시점에 벌어진 것이어서, 혹여라도 국정원 활동의 밀행성, 보안성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어 유사한 활동이 계속될 위험을 경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를 떠나, 이 사건 사이버 활동에 나타난 의견과 내용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떠나, 과거의 역사적 경험 등에 기초하여 국민 전체의 뜻이 강력하게 반영된 법을 위반한 행위에 대하여 마찬가지로 국민 전체의 뜻이 반영된 그 법을 엄정하게 적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거의 공정성을 해친 행위에 대한 법원의 그동안의 엄단 의지가 이 사건에서도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 사이버 활동에 나타난 의견과 내용 자체에 대하여는 이를 동의하고 지지하는 국민들이 분명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엄정한 법의 적용은 우리 국민들이 가질법한 그러한 생각과 의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자유롭게 하여야 할 정치적 참여와 표현을 정치 및 선거에 관여할 수 없는 국가기관 자신이 실행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헌법상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정면으로 위배했다는 점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국정원의 헌신 알고 있어... 국민 신뢰 더욱 얻길 바란다"
재판과정에서 피고인 이종명이 한 말에서 받은 강한 울림을 우리 재판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군은 전쟁을 준비하는 기관이지만 국정원은 지금 현재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앞서의 판단은, 국정원이 지금 현재 이 나라를 위하여 중차대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선 생명의 위험까지 따르는 임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하고 있음을 외면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에서 문제된 특정 사이버 활동만이 관련 법률에 반함을 명백하게 지적함으로써 국정원의 헌신과 노력이 본연의 업무수행을 위해서만 집중되도록 하여 장차 국민의 더욱 든든한 신뢰를 얻길 바라는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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