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 대학의 자화상 <진격의 대학교>
문학동네
대외부총장이 입을 뗐다. 그는 정작 식품영양학과 교수였지만 평소 '법인세가 과도하다'며 종편에 출연하는 단골 논객이었다. 다음 총선에서 여당의 비례대표 앞 순번이 유력하단 소문이 돌았다. 대기업에서 맡기는 연구용역도 모두 그의 차지였다. 그 때문인지 발언에 힘이 실렸다.
총장은 고민했다. 이미 융합이란 이름으로 상당수의 순수학문이 사라졌다. 어학만으로는 장사가 안 되니 '국제비즈니스랭기지학부', 행정학만으로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니 '5급공무원학부', 이제는 그마저도 힘드니 '심리철학힐링학과'를 아예 없애자는 논의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다.
교양 과정은 취업에 필요한 스킬을 습득하는 시간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강사는 '스피치컨설턴트'니, '자소서전문가'니 학문보단 배경으로 채용했다. 이런 강의의 평가가 높으니, 자연히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은 강의들은 도태됐다. 요즘 유행하는 소위 '취업 27종 세트'에 적합한 강의들이 살아남았다. 20년 전만해도 '3종'에 불과하던 '취업세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교양 강의에서는 '기업에 따라 8:2가르마냐, 9:1가르마냐, 회색 양복(물론 강사는 이를 세련되게 '챠콜그레이'라 칭한다)이냐, 남색 양복이냐'를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 알려줬다. 취미는 활동적인 기업에는 적당한 '야외활동'을 쓰는 법, 혹은 연구원에 지원하는 이들에겐 '뮤지컬 감상이나 독서'를 권했다. 1년 성인 독서량이 5권도 안 된다지만, 강사는 친절히도 최근 베스트셀러였던 <혁신을 넘어 창조경제> <다시 새마을운동이다> 따위의 책 줄거리까지 설명해준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교양 강좌로 조사된 '자소서로 취업 엎어치기'에서는 꼭 '시민단체 참여 경력은 숨길 것'을 첫 시간에 알려준다. 기업에서는 튀는 인재를 싫어한다는 이유다. 그런데 철학과는 쓸데없이 생각이 많아 이런 경향에 부합하지 않는단 평가도 뒤따랐다. 여러모로 철학과는 대학에서 쓸모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기준을 효율성의 잣대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마이너스일 뿐이다.
"나는 경영학과 학생이다. 내가 현재 듣는 수업 중에서 그나마 인문학에 가장 근접한 것은 '교육학개론'이다. 처음에는 순수한 이유에서 듣고자 했다. 경영학이 좀 삭막하니까, '교육'이라는, 수치화할 수 없고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학문을 접해보고 싶은 나름의 열정이 있었다. 하지만 몇 번 수업을 듣고 나니 회의감이 밀려왔다. 어느새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지'라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교육학 본연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사라졌다. 자소서에 이 과목을 통해 깨달은 바를 경영학과 '융합'이라는 말을 섞어가며 쓸 궁리나 하고 있었다. 수업에서 튀어나오는 심리학 이론과 유교사상에 대해 듣고는, 저런 걸 '활용하면' 인문학적 교양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 <진격의 대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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