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의 수도 서안 문화거리에 있는 서안 출신 인물 조각상
최종명
이렇듯 강압적인 방법으로 서민들의 입을 틀어막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입을 막는 것은 흐르는 강을 틀어막는것과 같습니다. 강을 막던 제방이 일단 터지면 멸정지재滅顶之災의 엄청난재난이 생길 것은 자명합니다. 사람의 입을 막으면 다가올 위험은 강물보다 더 치명적입니다. 치수治水는 채용소도采用疏導이니 막힌 수로를 통하게 하는 것이고, 치민治民은 창소욕언暢所欲言이니 천하의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누구나 하게 하면,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나타나게 되니 좋은 일은 격려하고 나쁜 일은 대비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걱정하는 바를 입 밖으로낼 때는 여러 번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어렵게 하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입을 막는다면 나라가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소공 소백호召伯虎는 군림하지 않으며 물 흐르듯 민심이 소통하는 나라의 지도자를 갈구했으나 주려왕은 '치약망문置若罔聞'했다. 쉽게 보면 '못 들은 체하다' 정도일지 모르나 그보다는 훨씬 강렬하다. 직언이나 비평, 하소연, 권고나항의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망국의 독재자에게 흔한 증상일지도 모르겠다.
주나라 수도 호경의 국인들이 들고 일어나 왕성을 쳐부수고 돌파해 나갔다. 주려왕은 폭도들을 진압하라 명령했으나 성을 지키던 관리들은 함성에 놀라 이미 도망갔다. 결국, 왕은 황하를 넘어 대부(大夫)가 다스리는 작은 영지인체읍彘邑(산서 곽주霍州)으로 도망갔다. '체'는 돼지라는 뜻으로 '국인의 민란'을다르게 부르면, 체 나라로 왕을 쫓아냈다고 '체지란彘之乱'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화 원년은 역사의 실마리왕을 몰아낸 반란 주동자들은 서둘러 주려왕의 아들 태자 정静을 죽여 근원의 싹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소공의 집을 포위했다. 소공은 왕에게 간언했던 사실을 알리면서도 군주의 신하로서 해야 할 도리를 읍소했다. 소공은 자기 아들을 태자를 대신해 내주었고 태자는 어렵사리 도망해 목숨을 부지했다.
왕과 태자가 사라지자 소공과 주 나라를 설계한 주공의 후예인 주정공(周定公)과 함께 두 사람이 주 나라의 정무와 행정을 주재하는 공화정을 펼치는데 이를 '주소공화周召共和'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재상두 사람이 왕을 대신해 국가를 경영한 기간은 14년이었다. 공화 14년, 주려왕이 14년만에 죽자 도망갔던 태자를 불러 주선왕(宣王)에 옹립했다. 재상의 정치를 편 두 제후는 나름대로 내치와 외교국방에 힘 썼으나 북방민족 견융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한 여름의 멍멍이 신세로 전락한다.
기원전 841년, 공화 원년은 사마천의 <사기>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연도이다. 이때부터 역사서의 편년체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130편에 이르는 <사기>의 '본기(本紀)' 및 '세가(世家)' 편 곳곳에 연대의 표시와 함께 '주려왕이 체로 도망(周厲王奔于彘)'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기준으로 역사의 흐트러진 시간대를 맞춘 것이다.
주선왕은 재위 39년 견융정벌에 나섰으나 대패했으며 재위 46년 만에 사망하고 문제의 인물인 주유왕幽王이 승계했다. 나라가 망하는 징조는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지만 가장 불명예는여자 때문에 망했다는 홍안화수(紅颜祸水)의 오명이 아닐까? 경국지색과 놀다가 망했다는 치욕은 망국의 군주가 각오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후대의 왕조는 멸망 주체로서의 명분을 잘 포장하기 위해 이 잡듯 패악을찾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매희(妹喜), 상나라 주왕과 달기(妲己)에 이어 불쌍한 '마지막' 군주, 서주 시대를 마감한 주유왕과 포사(褒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