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춘 작가. 사진은 2011년 4월,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인 김은숙씨를 위한 음악회에서 응원의 말을 하고 있는 유 작가의 모습.
연합뉴스
- 집필 작업은 어떻게 처음 제안하게 됐나. "제가 딱 희생 학생들 비슷한 나잇대 아이들을 14년 동안 가르쳤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나라가 왜 이 꼴이 되었나, 내 책임은 없나' 싶어서, 한동안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또래 아이들을 보지 못할 정도로 자책감이 컸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불에 다다르는 나라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싶었다.
저는 해난사고는 부패한 회사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이번 사건은 재난당한 국민을 구해야 할 의무를 국가가 저버린 것으로 국가의 범죄라고 봤다. 국가의 무능으로 인해 먼저 가버린 아이들을 위로하고 싶었고, 아이들을 잊히지 않게 할 기억투쟁의 방법을 고민했다."
- 본인이 직접 모은 작가만 총 125명이다. "모으는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제가 2007년쯤인가,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기념해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각 지역·분야별로 기록해 책을 기획한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알고 있는 작가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 처음엔 여성잡지 작가들이 대거 지원해 60여 명 정도가 자원했지만, 그 외에는 제가 이메일을 길게 써서 읍소하다시피 했다."
분량은 원고지 기준 학생 40매, 교사 80매로 정해져 있지만 형식은 다양하다. 작가가 유족들을 인터뷰한 뒤 인물의 생애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방식을 고르는 것. 현재까지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소설과 동화, 일기 등 다양한 방식의 원고 70편 정도가 완료됐다. 7월 말까지 1차 마감을 거친 원고들은 9월 말에 한 번 더 탈고된다.
- 책임자로서 약전을 최종 검토할 텐데, 그 내용을 잠깐 소개한다면. "충격적이었다. 경제 수준이 세계 10위권인 나라에서 이렇게 가난한 아이들이 있나 싶었다. 한 학생은 1주일에 3000원, 그러니까 하루 500원의 용돈으로 살기도 했더라. 한 부모 가정들도 많았다.
가장 가슴이 아픈 건 외동아들·딸을 잃은 경우다. 이 경우 대부분 부모들은 생업을 아예 접어버린다. 원래도 2~3평 되는 공간에 세탁소, 과일가게 등 작은 자영업을 했던 분들인데 다 문을 닫아버렸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총 학생 25명 중 한 명만 살아남은 반도 있다. 그 학생은 결국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갔다."
-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의미는 뭐라고 보나. "'혹한기 한 걸인이 얼어 죽어도 모두의 책임이 되는 사회가 가장 도덕적인 사회'라는 톨스토이의 말이 젊은 날 제 가슴을 쳤다. 지난해 4월, 304명이 수장당해 가는 것을 우리 사회가 실시간으로 지켜보지 않았나. 이게 국가인가 싶다. 저는 이번 사고가 반세기 동안 오로지 돈과 경제성장만을 추구한 사회에 던지는 총체적인 경고이자 적색 신호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좀 천천히 가더라도 약자, 청소년,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들을 돌아보면서 가라'는 가장 비극적인 경고문으로 읽었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역사적으로는 사실관계라는 뼈대가 남겠지만, 우리는 (희생된) 아이들이 어떤 희망과 절망을 안고 살았는지 보여주며 근육과 속살을 채우는 게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 본인이 집필하는 데 있어 중요시한 부분이 있다면. "저는 당시 2학년 1반과 3반을 담당하던 교사 2명과 학생 1명을 맡아 인터뷰했다. 교사 2명도 25세, 28세로 아이들과 진배없이 젊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가장 현실과 가깝게 쓸 수 있을까'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
또 하나 작가들이 합의한 부분은, 어둡고 슬픈 참사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16세 아이의 밝고 아련한, 수학여행 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사실 그래서 더 슬프다. 원고는 모두 '엄마, 나 수학여행 갔다 올게' 하며 손 흔드는 것으로 끝이 난다."
"죽은 아이들이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