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 표지
문학사상사
여행기의 글쓴이들도 저마다 여행을 떠난 이유가 있었다. 그중 '문득'인 경우도 많았다. 그들 역시 어느 날 문득 짐을 싸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어는 날 문득 공항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으며, 어느 날 문득 이국 어느 땅에서 여행자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럽 여행기 <먼 북소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본문 중에서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 이유가 있을까. 저 멀리 어딘가에서 들려 온 북소리. 북소리에 이끌려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다고 느낀 그 순간. 그 순간엔 여행을 떠나는 이유로 이보다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이유는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저 먼 이국 땅으로 날아가 이탈리아, 그리스 등을 여행하며 삼 년을 보낸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을 땐 그의 나이는 마흔 살이었다.
그 삼 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를 지금의 무라카미 하루키로 있게 한 소설 <상실의 시대>를 집필했고, 내가 유일하게 읽은 그의 장편 소설 <댄스 댄스 댄스>도 이때 완성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그는 그의 나이를 곱씹고 있었다. 곧 마흔이 될 거라는 그 사실에 왠지 생각이 많아졌다. 그에게 마흔은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인생의 고비"인 듯했고, "하나의 큰 전환점"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마흔이 되면 어떤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질 거라는 예감에 빠졌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삼십 대에만 쓸 수 있는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변화가 오기 전에, 즉 내 자신 속에서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뭔가 한 가지 보람 있는 일을 남기고 싶었다. 아마도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종류의 소설은 쓰지 않을 것이다(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할 만한 작품을 써놓고 싶었다.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 본문 중에서
그렇게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내와 함께 긴 여행길에 나선다. 한 곳에서 몇 개월씩을 머물며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주로 소설을 썼고, 가끔은 달렸으며, 나머지 시간엔 여행을 했다. 그 여행에 대한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의 여행하지만 이 여행기는 보통의 여행기와는 어느 면에서 많이 다르다. 그가 말했듯 이 책에는 계몽적인 요소도 유익한 정보도 없다. 그저 무라카미 하루키가 본 것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뿐이다. 자신이 느낀 것을 되도록 있는 그대로 쓸 것, 안이한 감동이나 일반화된 논점에서 벗어날 것, 되도록 간단하고 사실적으로 쓸 것, 이것이 이 여행기를 쓸 때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킨 나름의 원칙이었다.
친한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기분으로 써 내려간 이 책엔 그래서 특별한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아테네에서 만난 부동산 중개인의 특이한 말투에 대한 이야기, 스펫체스섬에서 만난 음탕한 조르바들 이야기, 또 그곳에서 만난 물난리, 또 그곳에서 먹은 저녁들("비프 스테이크일 때도 있고 정어리 튀김일 때도 있고 도미밥인 경우도 있고 야채스튜일 때도 있고 전갱이 소금구이인 경우도 있"는), 미코노스에서 만난 인사 잘하는 반젤리스, 크레타 섬에서 만난 술 취한 버스기사, 아테네 마라톤 참가, 버릇없는 로마 아이들 등등 소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이 책의 대부분을 이룬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겐 마냥 좋은 여행기이다.
나는 에펠탑을 가고 싶기 보다, 그 주위를 기웃거리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나는 트래비 분수를 가고 싶기 보다, 그곳을 가는 도중에 들른 카페에 앉아 하루를 몽땅 쏟아 붓고 싶다. 나는 가우디 건축물을 보기 보다, 골목 어딘가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그곳 사람들을 바라보고 싶다. 목적 없이 문득 멈출 수 있는 여행. 그것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이다.
지금 나는 또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올해 쓸 수 있는 여행 쿠폰을 다 써버렸다. 한 달이나 제주도를 갔다 와놓고 또 어딜 간단 말인가. 아, 정말이지 매번 주머니가 두둑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요 며칠 계속 여행기를 읽고 있다. 문득 찾아온 충동을 잠 재우기 위해서.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다른 사람들은 다 여행을 떠난다고 분주한 이 시기에 나처럼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을 한번 펴보면 어떨까. 나처럼, 여행기를. 분명, 이 또한 즐거운 여행일 돼 줄 것이다.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문학사상사, 200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