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연속 천리길 달려온 이유, 그 남자 때문

[108산사순례 26] 인제 내설악 백담사

등록 2015.08.24 17:02수정 2015.08.2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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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내설악백담사 일주문. 일반 여행자들은 버스를 타고 주차장에 내리면 바로 사찰로 들어가게 되는데, 일주문을 통과하려면 1백미터 정도를 돌아서 걸어나와야 한다.
일주문내설악백담사 일주문. 일반 여행자들은 버스를 타고 주차장에 내리면 바로 사찰로 들어가게 되는데, 일주문을 통과하려면 1백미터 정도를 돌아서 걸어나와야 한다.정도길

티끌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깎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샘을 팠다.

이곳에 가면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오늘 가는 이 길, 겉으로는 부처님을 뵈러 간다지만, 속으로는 이 분을 뵙고자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산거>라는 시의 첫 연이다. 시의 구절에서 기개가 넘쳐나고 굳센 의지가 느껴진다. 부처님이 걸었던 그 고행도 녹아있다. 붓끝으로 보여준 지조와 나라사랑... 그 누가 이분의 정신을 훼손하겠는가.


학창시절 몇날 며칠을 반복해서 읽으며, 전 구절을 외운 시 하나. 그 시의 한 구절처럼,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이라는 믿음. 나는 그 믿음으로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의 삶과 그의 글이 다르지 않게 살았던 만해 한용운을 만나러 백담사로 가는 길에서.

극락보전 백담사 극락보전과 삼층석탑.
극락보전백담사 극락보전과 삼층석탑.정도길

이곳에 가면 잊고 싶은, 또 다른 한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사람은 부처님이 계신 극락보전 우측에 터를 잡아 몇 년 세월을 보냈다.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그 분(?)이다. 불교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 네 가지 고통을 넘어, 여덟 가지 고통을 말하는 '8고(八苦)' 중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인 '원증회고(怨憎會苦)'가 있다.

누가 그 방에 머물도록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부처님의 지혜로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불교의 근본인 자비실천에 비추어 본다면.

일주문에 이름을 단 '내설악백담사'.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에 따르면, 647년(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담사'란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백담사까지 작은 '담(물이 깊게 괸 곳)'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서 사찰을 세웠다고 전해진 데서 유래한다. 대한불교조계종 기초선원으로, 갓 득도한 승려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주제로 실시하는 템플스테이도 유명하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1182호(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1276호(인제 한계사지 북 삼층석탑)가 있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템플스테이로 유명한 백담사

수심교 백담사 입구 수심교. 마음을 깨끗이 씻고 부처님을 뵈러 가야 하지 않을까.
수심교백담사 입구 수심교. 마음을 깨끗이 씻고 부처님을 뵈러 가야 하지 않을까.정도길

백담사를 찾는 여행자는 대개 마을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백담사 주차장에서 바로 사찰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일주문까지 다시 걸어 나와 합장하고 사찰로 들어가야만 했다.


백담계곡을 건너는 긴 다리는 수심교. 이곳에서부터 마음을 닦고 절에 들어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것이요, 곧 부처가 되겠다는 발원을 세우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리 위에서 보는 깊은 계곡과 산자락은 여행자를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계곡에 쌓아 놓은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돌탑들. 작은 탑 하나를 쌓는데도 많은 공을 들였으리라. 폭우가 쏟아지고 많은 물이 계곡을 강타하면, 공을 들여 만든 저 탑도 무너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 그래도 아쉬워 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다시 공을 들여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탑을 쌓는 의미는 있을 테니까.

금강문 금강문에서 바라 본 불이문과 삼층석탑 그리고 극락보전.
금강문금강문에서 바라 본 불이문과 삼층석탑 그리고 극락보전.정도길

금강역사를 모신 금강문에서 보는 불이문, 삼층석탑 그리고 중심법당인 극락보전. 짧지만 일직선으로 배치된 가람 형태를 보인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뜻'을 가진 불이문은, 사찰 건축에서 보기 드문 솟을대문 형식으로 지었다.

편액은 앞쪽에는 '백담사', 안쪽에는 '설악산'이라 달았다. 모서리가 닳은 옥개석과 이끼 낀 삼층석탑은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극락보전 용마루 끄트머리는 용의 머리로 치미를 장식했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법당에는 서방정토 극락세계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주불로, 좌우 협시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셨다. <108산사순례> 때마다 의례적으로 하는 경전 독송과 108배를 올렸다. 32번째 염주 알을 꿰면서, 그동안 꿰어온 염주 알 하나하나를 세어본다. 이 기도가 헛되지 않고 잘 끝나기를 다짐하면서.

이제 만해 선사를 만나러 간다. 백담사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전각이 많다. 대표적인 건물로 만해기념관을 비롯하여, 만해교육관, 만해연구관, 만해수련원, 만해도서관 등이 있다. 문이 열려있는 기념관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만해의 목각좌상과 그 왼쪽으로 만해 초상화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은은한 음악이 울리는 작은 공간, 부처님이 계신 법당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가슴을 요동치게 만든다. 발걸음 한 걸음 옮겨 놓는 것도 조심스럽다. 법당에서 걷는 걸음걸이처럼. '사진촬영 금지'라는 안내 때문에 머리로,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선사의 혼과 정신을 담았다. 어느 글귀 하나가 발걸음을 한동안이나 묶어 놓는다.

만해기념관 만해기념관에 가면 만해 한용운의 삶과 역사와 사상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가 있다.
만해기념관만해기념관에 가면 만해 한용운의 삶과 역사와 사상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가 있다.정도길

불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만해의 열정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나의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 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왜 그러냐 하면 똥 옆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역하여 차마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삼십일 본산 주지 바로 네놈들이다."

한용운 선사는 한국 불교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개최된 31본사 주지회의에서 이같이 연설했다. 당시 이 연설을 할 때 선사의 격한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두 손을 불끈 쥔 채, 얼굴은 달아올랐고, 심장은 뛰었으며, 격앙되고 흥분되었으리라.

위당 정인보 어록에도,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선사의 불교개혁 정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불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선사의 <조선불교 유신론>과 <불교대전>의 원전도 이곳 기념관에 있다.

만해 흉상 만해 한용운 흉상. 안내글에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 쓰여 있다.
만해 흉상만해 한용운 흉상. 안내글에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 쓰여 있다.정도길

만해는 법정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만해는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서를 33인을 대표하여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그리고는 총독부에 전화를 걸게 하여 모든 사실을 알렸고,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후 진행된 법정에서는 재판부를 향하여 나무란다. "조선인이 조선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 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본인이 어찌 감히 재판하려 하느냐"고.

옥중 투쟁 3대원칙도 정했다. 보석을 요구하지 말라, 사식을 취하지 말라,  변호사를 대지 말라. 3년을 복역하고 출감한 만해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1944년 6월 세수 66세, 법랍 39세로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한다. 안타깝게도 광복의 기쁨을 느끼지도 못한, 1년을 앞둔 해였다.

만해당 만해 한용운 선사를 기리는 만해당.
만해당만해 한용운 선사를 기리는 만해당.정도길

만해는 1917년 12월 오세암에서 참선 중 진리를 깨우쳤다. 그리고 '오도송'을 읊었다. 오도송은 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를 말한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세계 뒤흔드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역사적 인물의 흔적을 간직한 백담사

만해의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백담사에서 승려가 돼 구도자의 길을 걸었고, 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고 불제자로서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고 지배했을 때, 굳은 지조와 대쪽 같은 기개는 민족정기를 만방에 떨치는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며 그 역할을 다했다. 사랑을 노래한 시인으로서 민초들의 가슴을 울렸다.

위대한 사상가로, 나라사랑을 실천한 독립운동가로, 불교의 깊이를 더한 대선사로 그리고 향기 나는 시인으로서, 아직까지도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지난 여름, 꼭 이맘때 백담사를 찾았다. 만해기념관에서 느꼈던 그 진한 울림은 내 가슴의 벽을 치며 파고든다. 부처님을 존경하고 법을 따르듯이, 만해 한용운 선사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닮고 싶었다. 지난해와 올해 이태 동안, 백담사 만해기념관에서 한참이나 머물러 있어야만 했던 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돌탑 백담사 앞 백담계곡에 공들여 쌓은 크고 작은 돌탑들. 올해는 계곡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사진은 지난해 여름 이맘 때 촬영한 사진이다.
돌탑백담사 앞 백담계곡에 공들여 쌓은 크고 작은 돌탑들. 올해는 계곡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사진은 지난해 여름 이맘 때 촬영한 사진이다.정도길

백담사에 이르는 길, 그 시작과 끝은 '기다림'의 미학이다. "얼른 갔다, 얼른 오겠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있다. 강원도 인제군 용대리 용대마을향토매표소에서 백담사까지는 약 7km. 걸어서는 약 2시간이 걸리고, 마을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매년 여름철,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약 1개월간 집중 운행하고 있다. 그 외 기간에는 사전 문의가 필요하다.

백담사로 향하는 상행 첫차는 오전 7시, 막차는 오후 6시에 출발하고, 백담사에서 마을로 향하는 하행 막차는 오후 7시에 떠난다.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37명 정원이 차면 바로 출발하며, 요금은 성인 기준으로 편도 2300원. 백담사에 가려는 여행자는 사전에 반드시 여행정보를 파악하고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용대리 향토기업 033-462-3009)

108배 <108산사순례> 32번째 여행을 마치고 32번째 염주 알을 꿰었다.
108배<108산사순례> 32번째 여행을 마치고 32번째 염주 알을 꿰었다.정도길

백담사는 근대와 현대사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역사적 사건을 안고 있는 인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사찰이다. 본받고 계승해야 할 역사와 두 번 다시 반복하지 말아야 하고 청산해야 할 역사를 안은 백담사.

나는 연이어 이태 동안 천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왜 여기까지 한숨에 달려왔는가. 묻는다. 그리고 답하노라. 아직도 친일세력이 득세하고, 국민을 위협했던 반민주세력이 판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민족 앞에, 국민 앞에, 죄지은 이들이여. 고개 숙여 진심으로 참회하라. 광복 70년을 맞아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열들의 그 숭고한 정신과 영혼을 기린다면.

청정옥수 백담사 계곡을 흐르는 청정 옥수.
청정옥수백담사 계곡을 흐르는 청정 옥수.정도길

백담계곡을 흐르는 100개의 '담'에 고인 옥색의 물은 보석보다 더 맑고 투명하다. 그 샘에서 물 한 바가지를 떠 마셨다. 정신이 번쩍 든다. 육신은 벌써 백담사를 뒤로 하고 수심교를 건너고 있다. 인제 백담사에서 <108산사순례> 그 서른두 번째 염주 알을 꿰었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지난 8월 5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블로그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에도 싣습니다.
#백담사 #내설악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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