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루공산성의 서문 금서루에 구름이 닿아 있다
임재만
공주 공산성은 백제의 피난처였다.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과 싸우다 죽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그의 아들 문주왕이 부득이 도읍을 옮긴 곳이다.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에 수도를 세종시로 옮기는 과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었는가? 결국 행정수도로 축소되지 않았는가? 당시에도 도읍을 한강유역에서 웅진으로 옮기는 것에 수구세력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결국 천도를 반대한 무인세력 해구에 의하여 문주왕은 살해되고, 그의 아들 삼근왕까지 3년만에 병사하였다. 손자 동성왕이 신하에 의하여 또 살해되자 왕권이 크게 흔들리며 국가의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무령왕이 아버지 동성왕을 살해한 신하를 일벌백계로 엄벌에 처하면서 왕권을 다시 찾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성왕이 전성기를 맞는다.
도읍 옮긴 백제, 수구세력의 반대큰 나라로 발전하기에 웅진이 도읍으로 비좁다고 생각한 성왕은 다시 사비(부여)로 옮기게 된다. 이로써 공산성은 약 63년간의 도읍지로 길지 않은 역사를 끝내고 만다. 그 후에도 조선의 임금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6일간 피신처로 머물렀다고 한다. 결국 공산성은 백제의 임시수도 이자 왕들의 피신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펴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를 했으며, 불교문화가 매우 발달하여 그 영향이 일본에까지 미치는 문화대국이 되었다. 지금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는 바람에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인의 혼을 담은 예술품이 곳곳에서 발견되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도 그렇고,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지금은 교토의 광륭사와 법륭사에 남아있는 미륵반가사유상과 백제관음상은 세계 지성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받고 있다. 당시의 백제가 군사적으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선진국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1일, 공산성의 입구인 금서루에 올라섰다. 길게 누운 성곽을 바라보니 무언가 알 수 없는 비애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잠시 머문 도읍지라지만 면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다. 도읍지의 모습을 찾기 힘들다. 그냥 군사요충지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