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보이는 것이 한라산. 한라산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그림 같다. 한라산 앞엔 풍차들이 있다.
황보름
주위 풍경은 우리의 넋을 놓게 만들었다. 흐릿하게 여기저기 솟아있는 오름 군락이 보였고, 사장님의 손 끝으로는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한라산의 머리가 슬며시 떠올라 있었다. 따라비 오름과 한라산 사이에는 얼마나 긴 거리가 놓여있을까. 마음 같아선 그 사이에 놓여있는 풍차들을 디딤돌 삼아 펄쩍펄쩍 뛰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섯 명이 아무 말 없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서성거리고만 있자 보다 못한 사장님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 없다는 듯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쉬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우리를 한 줄로 세우기도 하고, 각종 포즈를 주문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방방 뛰며 사진을 찍자 따라비 오름의 분위기에 압도 됐던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자연스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풀린 얼굴로 오름을 내려오니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사장님 어머니가 차려주신 정성 가득한 아침밥을 먹고 소화까지 다 끝낸 후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극구 괜찮다고 하는데도 전날에 이어 가이드님이 나를 목적지까지 태워준다고 나선다. 가이드님은 오늘 집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단다. 나 때문에 굳이 일찍 나서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냥 가이드님의 삶의 낙을 위해 잠자코 차에 올라탔다.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가이드님의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이 어떻게 종지부를 찍게 됐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왜 가이드님이 여자를 두려워하게 됐는지를 알게 됐다. 예전에는 무슨 일을 했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꼬박 들었다. 고개만 달랑거리는 고양이 인형처럼 끄덕끄덕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종달리항 근처까지 와 있었다.
가이드님께는 대충 아무데나 세워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았다고 대답을 한 가이드님은 짐짓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보름씨는 비밀이 많아 보여요.""네엣? 왜요?""자기에 대해서 말을 안 해. 보름씨가 생각이나 감정을 말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긴 여행지잖아요. 그냥 다 내려놔요. 그냥 편하게 여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에요.""아, 네…."졸지에 비밀스러운 여자가 돼버린 나는 종달리와 하도리 사이의 해안도로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가이드님을 보내고 걷기 시작하자 슬며시 웃음이 났다. 가이드님이 보기에도 내가 뭔가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게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서른 이후 여행을 즐기기 시작하다 비밀이 많아 보인다는 둥, 생각이나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둥, 이런 말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뭘 얼마만큼 털어놔야 할지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기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나도 알고 있던 터였다.
예전엔 생각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행지라고 해서 일상에서 죽 해오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상 속의 내 분위기도 그대로 달고 다녀야 했다. 힘들게 일을 하다 여행을 왔다고 해서 홀가분해지거나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을 본다. 일상과 여행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사람들. 일상의 고단함을 여행지에서 말끔히 씻어내는 사람들.
나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막막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짐을 꾸려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하는 내 바람은 이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기를. 왜 좋은 여행자가 돼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저 바랐다.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러다 서른이 넘은 후에 다녔던 여행은 내게 조금씩 다른 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설렘과 흥분·기쁨이 느껴졌다. 사진 속 내 웃음도 달라졌다. 정말 딱 여행지에서나 나올법한 해맑은 표정이 사진 곳곳에 박혀 있었다.
그 이유는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일상에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서른 즈음부터 일상의 무게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부질없는 욕심과 답 없는 고민도 덜어내고자 노력했다. 좋아하던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웃기도 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내려놓게 된 것도 있었다. 일상을 변화시키니 여행의 진짜 맛을 느끼게 된 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일상과 여행을 도통 분리하지 못하는 나의 이런 습성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나는 여행이 도피처나 자극제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일상과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내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여행이 내겐 더 맞다.
그런데 가이드님이 나의 이런 여행 습성을 알아내다니. 그가 정말 내 깊은 곳을 들여다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나는 일상에서 내가 내려놓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