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 몰리는 '핫'한 해변, 지켜보니 안타깝다

[30일, 제주를 달리다 16] 그 열네 번째 날

등록 2015.08.31 16:34수정 2015.08.3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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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아무 데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곳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게스트에서 퇴실을 요구하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책이나 좀 읽다가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면 묵은 피곤도 어제의 우울도 싹 날아갈 듯싶었다. 마침 비도 오니 잘 됐다. 역시, 비가 올 땐 집에서 쉬어야 한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 한 권을 들고 식당 겸 카페로 향했다. 카페로 들어서니 사장님과 사장님 어머니, 그리고 몇 분의 게스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저 멀리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심호흡을 한 후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사장님 : "보름씨는 오늘 어디 안 가요?"
나 : "전… 책도 읽고 좀 쉬려구요. 비도 오고 어디 가기도 좀 뭐해서요."
사장님 어머니 : "그럼 여기 이 사람들하고 같이 나가. 차 타고 다니면 힘들지도 않을 거야. 여기 이 친구(말이 좀 많았던 사장님 친구분, 앞으로는 '가이드님'으로 부르기로 함)가 제주도 빠삭이야. 여기저기 많이 데려다 달라고 해."
나 : "네? 아니에요. 전…"
가이드 : "그래요. 같이 나가요. 오늘 나만의 맛집 2위를 공개할 겁니다. 그리고 가고 싶은 데 아무 데나 말해봐요. 그게 몇 년 전이더라. 내가 제주에서 200일 정도를 묵은 적이 있어요. 안 가본 데가 없지. 네비가 없어도 눈을 감고 운전을…"
사장님 어머니 : "그래, 나가. 여기 이 친구들도 다 같이 갈 거야."

맛집? 아무 데나 다 데려가 준다고? 흐음. 내가 원래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었던가. 나는 어느새 차에 올라타 있었다. 그렇게 어제 함께 고기도 먹고 맥주도 마셨던 우리는 이날 하루 안내자를 자청한 가이드님의 차를 타고 함께 제주를 달리기 시작했다.

여행하다 보면, 행운의 여신을 만나게도 된다

비와 함께 안개도 자욱이 깔려 있었다. 이런 안개는 처음 봤다. 운전 시야도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고작 10m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앞차 후미등 불빛만 저 멀리에서 흐릿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가이드님은 속도를 줄여가며 말했다.

제주에선 가끔 이렇게 안개가 낀다고 했다. 초보 여행자에겐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자기에겐 익숙한 상황이니 안심하라고.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제주는 뜻밖에 교통사고 사망률이 높은 지역이었다. 예전에 제주에서 운전할 때 속도 제한 때문에 답답했던 기억이 났다. 뻥 뚫린 도로를 달릴 때도 시원하게 밟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사망률이 높은 걸까.


관광객들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관광객들이 속도 제한을 지키지도 않고, 제주 도로에 익숙하지도 않기 때문에. 여기다 제주 할머니, 할아버지 중에는 운전면허 없이 트랙터를 몰다가 사고를 당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이런 분들은 약간 무대포(막무가내)로 운전을 하신단다.

얼마나 달렸을까. 안개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안개 때문일까. 또다시 기분이 처져버렸다. 그래서 처방을 바라며 제주도 여행 선배들에게 물었다. 나 지금 왜 이런 거냐고.


"오늘이 여행 며칠째죠?"
"2주 정도 됐어요."
"왜 우울한 것 같은데요?"
"그냥, 바다가 좋아 제주에 왔는데… 바다를 매일 보는데도 왜 이럴까요. 매일 아침 일어나 어디를 가야 한다는 게 힘든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그냥 울적해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날 때마다 제주에 들른다는 가이드님은 자기 또한 그런 적이 있다며 나를 또 한 번 안심시켰다. 여행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닌 거라고. 그것도 혼자 여행을 하는 일은 특히. 그럴 땐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는 그런 기분이 들면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마냥 잠만 잔다고. 그럼 기분이 다시 원상복구 된다는 거였다.

옆에 앉아 있던 장기수도 맞장구를 치며 동의했다. 역시 우울엔 잠이 최고라고. 자기도 그래서 어제 낮 동안 내내 잠을 잤다며 느긋한 웃음을 흘려 주었다.

잠을 자야 하는 거였는데 또 사람들을 따라나선 나는 그렇다면 이 기분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는지 걱정스레 다시 물었다. 가이드님은 안심하라고 했다.

"왜요?"
"오늘은 여행하는 게 아니라 푹 쉬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여행하고 있는데…어떻게요...?"
"머리를 쓰지 말라는 거에요. 그냥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요."

알고 보니 가이드님은 자기희생과 봉사를 삶의 낙으로 삼고 있는 분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처음 보는 사람들을 친한 동생처럼 챙겨주었다. 여행하다 보면 이런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건가 싶었다. 덕분에 우리는 행운의 여신을 만난 듯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쉬듯이 여행할 수 있었다.

차는 해안도로로 접어들었고, 안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우리는 동쪽을 향해 달렸다. 달리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가이드님이 추천한 맛집에 들러 생선 조림을 먹기도 했다. 자기랑 왔기 때문에 맛있는 걸 먹게 된 거라며 가이드님은 자부심을 드러냈다. 자부심을 느껴도 될 만큼 정말로 맛이 참 좋았다.

월정리 해변의 변화, 안타깝다

 비오는 날의 월정리 해변
비오는 날의 월정리 해변 황보름

그다음엔 어디로 갈까. 아무도 선뜻 장소를 택하지 못했기에 결국 또 가이드님의 추천으로 월정리 해변에 가기로 했다. 가는 동안 우리는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월정리 해변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수한 민낯이 아름다웠던 월정리 해변. 지금은 민낯 여기저기에 분이 칠해지고 있다. 그리고 분칠에 이끌려 오는 여행객들 덕택에 월정리는 점점 더 유명해지는 중이다.

제주에 오기 전에는 월정리 해변을 몰랐었다. 오고 나서야 이곳이 요즘 아주 '핫'한 해변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진이 그렇게 예쁘게 나온단다. 해변에 놓인 벤치에 앉아 사진을 찍으면 하나같이 그림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제주를 오래전부터 여행하던 사람들과 제주 도민들에게 월정리 해변은 안타까운 장소가 되었다.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는 지금의 월정리 해변 분위기와 그림 같은 카페들은 정작 이곳을 원래 사랑했던 이들에겐 빛이 바랜 모습일 뿐이다. 육지에서 잠시 놀러 온 이들의 예쁜 사진을 위해, 짧은 순간의 유희를 위해, 바다의 원초적 멋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날 잠시 이야기를 나눌 때 사장님 어머니도 월정리 해변을 보면 화가 난다고 했다. 해변이 어떻게 변했길래 그럴까. 혹시, 섭지코지처럼 변한 걸까. 어머니는 이곳 주민들은 섭지코지 또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말해 주셨다.

며칠 전 성산 일출봉에서 섭지코지를 향해 걸으며 오래전 그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섭지코지를 올랐던 날. <올인>에 나와 유명해졌다는 건물의 우아함과 절벽 높이 세워진 하얀 등대를 바라보던 그 날. 그날의 섭지코지는 내게 제주의 아름다움을 대변해 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찾은 섭지코지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섭지코지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그 주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거대한 리조트 단지가 섭지코지를 에워싸고 있었고 섭지코지는 그 리조트에 딸린 정원쯤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올인' 하우스도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헨젤과 그레텔에나 나올 법한 장난감 하우스가 어색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보기에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섭지코지에서 성산 일출봉을 향한 시야를 막고 있는, 주위 경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레스토랑이었다. 그 레스토랑을 보자 나는 가슴이 너무나 답답해졌다. 개발은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는 건가 싶었다. 이렇게 무분별하게, 이렇게 엉망으로.

도구를 휘둘러야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개발을 무조건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본능을 억누르는 이성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다운 행동 아닐까. 이제 섭지코지 주위엔 인간의 본능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보기 싫어 얼른 섭지코지를 빠져나왔었다.

월정리 해변을 사랑했던 사람들도 이런 답답함을 느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가이드님의 차를 타고 해변으로 향하는 마음이 그렇게 설레지만은 않았다.

비는 그치는 듯하다가 다시 굵어졌다. 월정리 해변 앞 어느 카페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로 그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에서 보는 해변은 역시나 아름다웠다. 해변이 아름답지 않았으면 지금처럼 유명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카페 앞 아기자기한 벤치도 예뻤고 우리가 자리 잡고 앉은 카페의 분위기도 왠지 사람의 마음을 달콤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생전 찾지 않던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커플들은 비를 맞으며 해변가를 거닐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들, 이곳 분위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우리. 월정리 해변엔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리기 전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니까. 월정리 해변의 원래 모습은 큰마음 먹고 예쁜 사진을 찍으러 제주를 찾은 사람들의 눈엔 보이지 않을 거였다. 그들 입장에서는 볼 필요도 없는지 몰랐다. 월정리 해변은 다른 모습을 기대하기엔 이미 매우 아름다운 스튜디오가 되어 있었으니까.

보지 못했던 이전의 월정리 해변을 상상 속으로나마 떠올리며 가이드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땐 허름한 카페 한 곳이 전부였다며 당시 이곳의 모습을 열심히 묘사해 주었다. 우리는 가이드님의 긴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게 뭔지 정도는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두루 드라이브하다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새로 들어온 손님들이 있었다. 그분들과 함께 카페에 둘러앉았다. 어제처럼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덧붙이는 글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제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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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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