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많아 보여요" 가이드 말에 웃음이 났다

[30일, 제주를 달리다 17] 열다섯 번째 날, 따라비오름 그리고 하도리 마을

등록 2015.09.10 17:12수정 2015.09.1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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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게스트하우스는 매일 아침마다 오름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누구나 신청만 하면 참가할 수 있는 오름투어에는 하나의 조건이 붙는다. 오전 6시 정각까지 무조건 집합해야 한다는 것. 나오지 않으면 단 1분도 기다려주지 않고 바로 출발한단다. 부랴부랴 일어나 대충 씻고 나가니 이미 다른 손님들은 모두 차에 올라타 있었다. 마지막에 올라탄 나를 실은 차는 20분을 달려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따라비 오름 입구에 도착했다.

전날 저녁 새로 도착한 대학생 두 명과 신혼인데도 혼자 여행을 왔다는 새신랑 그리고 장기수와 장기수 친구, 마지막으로 나는 사장님을 따라 말없이 안개를 헤치며 오름을 올랐다. 마치 구름 속을 산책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사방이 안개로 자욱했다. 안개덕분에 운치도 그만이었다.


"이름이 왜 따라비에요?"
"들어올 때 보면 써 있어요. 주위의 새끼오름, 모지오름, 장자오름 중 이 오름이 가장격이라 해서 '따애비'로 불리던 것이 '따래비'로 되었고 지금의 '따라비'가 된 거래요. 그런데 이것도 그저 설(說)이에요. 다른 설도 있어요."
"다른 설은 뭔데요?"
"음… 기억 안나요. 후후."

정상에 서자 생각보다 훨씬 큰 오름이었다. 사장님이 가리키는 오름의 반대편 쪽으로 가려면 10분은 더 걸어가야 할 것 같았다. 분화구가 세 개 있는 것이 특징인 오름이라더니 그 모양이 정말 독특했다. 산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세 명의 거인이 한 숟가락씩 떠 먹으면 이렇듯 서로 교차하는 아름다운 능선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억새의 아름다움이 더해져 가을에 특히 더 아름답다는 따라비 오름. 내겐 안개 낀 여름의 따라비 오름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a  따라비 오름 분화구 모습

따라비 오름 분화구 모습 ⓒ 황보름


a  저 멀리 보이는 것이 한라산. 한라산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그림 같다. 한라산 앞엔 풍차들이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한라산. 한라산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그림 같다. 한라산 앞엔 풍차들이 있다. ⓒ 황보름


주위 풍경은 우리의 넋을 놓게 만들었다. 흐릿하게 여기저기 솟아있는 오름 군락이 보였고, 사장님의 손 끝으로는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한라산의 머리가 슬며시 떠올라 있었다. 따라비 오름과 한라산 사이에는 얼마나 긴 거리가 놓여있을까. 마음 같아선 그 사이에 놓여있는 풍차들을 디딤돌 삼아 펄쩍펄쩍 뛰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여섯 명이 아무 말 없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서성거리고만 있자 보다 못한 사장님이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 없다는 듯이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쉬지 않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우리를 한 줄로 세우기도 하고, 각종 포즈를 주문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방방 뛰며 사진을 찍자 따라비 오름의 분위기에 압도 됐던 사람들의 얼굴이 조금씩 자연스럽게 풀어지기 시작했다. 풀린 얼굴로 오름을 내려오니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다.


사장님 어머니가 차려주신 정성 가득한 아침밥을 먹고 소화까지 다 끝낸 후 나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극구 괜찮다고 하는데도 전날에 이어 가이드님이 나를 목적지까지 태워준다고 나선다. 가이드님은 오늘 집으로 올라갈 예정이었단다. 나 때문에 굳이 일찍 나서는 줄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그냥 가이드님의 삶의 낙을 위해 잠자코 차에 올라탔다.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가이드님의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이 어떻게 종지부를 찍게 됐는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왜 가이드님이 여자를 두려워하게 됐는지를 알게 됐다. 예전에는 무슨 일을 했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꼬박 들었다. 고개만 달랑거리는 고양이 인형처럼 끄덕끄덕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종달리항 근처까지 와 있었다.


가이드님께는 대충 아무데나 세워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았다고 대답을 한 가이드님은 짐짓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보름씨는 비밀이 많아 보여요."
"네엣? 왜요?"
"자기에 대해서 말을 안 해. 보름씨가 생각이나 감정을 말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여긴 여행지잖아요. 그냥 다 내려놔요. 그냥 편하게 여행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에요."
"아, 네…."

졸지에 비밀스러운 여자가 돼버린 나는 종달리와 하도리 사이의 해안도로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가이드님을 보내고 걷기 시작하자 슬며시 웃음이 났다. 가이드님이 보기에도 내가 뭔가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게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서른 이후 여행을 즐기기 시작하다

비밀이 많아 보인다는 둥, 생각이나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둥, 이런 말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뭘 얼마만큼 털어놔야 할지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기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를 내려놓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나도 알고 있던 터였다.

예전엔 생각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행지라고 해서 일상에서 죽 해오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상 속의 내 분위기도 그대로 달고 다녀야 했다. 힘들게 일을 하다 여행을 왔다고 해서 홀가분해지거나 자유를 만끽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을 본다. 일상과 여행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사람들. 일상의 고단함을 여행지에서 말끔히 씻어내는 사람들.

나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막막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짐을 꾸려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하는 내 바람은 이거 하나였는지도 모르겠다. 좋은 여행자가 될 수 있기를. 왜 좋은 여행자가 돼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몰랐다. 그저 바랐다.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러다 서른이 넘은 후에 다녔던 여행은 내게 조금씩 다른 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설렘과 흥분·기쁨이 느껴졌다. 사진 속 내 웃음도 달라졌다. 정말 딱 여행지에서나 나올법한 해맑은 표정이 사진 곳곳에 박혀 있었다.

그 이유는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일상에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서른 즈음부터 일상의 무게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부질없는 욕심과 답 없는 고민도 덜어내고자 노력했다. 좋아하던 책을 더 많이 읽었고, 더 많이 웃기도 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내려놓게 된 것도 있었다. 일상을 변화시키니 여행의 진짜 맛을 느끼게 된 터였다.

그리고 지금은 일상과 여행을 도통 분리하지 못하는 나의 이런 습성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나는 여행이 도피처나 자극제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일상과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내게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여행이 내겐 더 맞다.

그런데 가이드님이 나의 이런 여행 습성을 알아내다니. 그가 정말 내 깊은 곳을 들여다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나는 일상에서 내가 내려놓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수 있었다.

a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 황보름


하도리를 걷다

하도리. 오늘 내가 거닐 곳은 종달리 옆에 위치한 하도리란 마을이다. 제주에 여행을 왔다가 제주가 너무 좋아 우도에 자리를 잡게 된 어느 분의 추천으로 오게 됐다.

'하도리로 가보자'는 결정 외엔 다른 계획을 세워 놓지 않았던 나는 우선 해안도로를 죽 걸어보기로 했다. 1시간쯤 걸었을까. 걷다 힘이 빠져 바다 앞 카페에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가이드님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는 칵테일인 모히토를 한 잔 시켜놓고 잠시 잡지를 읽었다.

잡지에는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글이 실려 있었다. 멋지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모히토의 기운 때문인지, 용기가 났기 때문인지, 스스로에게 잠을 청했다. 20분 정도 자고 일어나 졸기도 하며 모히토를 마시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모히토가 한 방울도 남지 않은 걸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태양은 더 뜨거워져 있었다.

피곤한 끝에 마셔서인지, 뜨거운 태양 때문인지, 겨우 모히토 한 잔에 마치 소주 한 병을 마신 것처럼 취한 기분이 됐다. 그래서 나는 술에 취해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얼른 칼국수 집으로 들어갔다. 경험상 알고 있었다. 취했을 때 밥을 먹으면 취기가 빠진다는 걸.

해녀가 직접 운영한다는 그 칼국수집은 성게칼국수가 주메뉴인 것 같았다. 칼칼하고 시원한 맛이 좋았다. 역시 해장엔 시원한 국물이기도 하다. 해장의 힘을 받은 나는 아무도 없는 해변에 혼자 들어가 발장구를 치기도 하고, 하도리 마을 여기저기를 둘러보기도 했다. 우도에 자리를 잡은 그 분이 왜 하도리를 추천했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a  아무도 없던 하도리 마을 근처 해변가

아무도 없던 하도리 마을 근처 해변가 ⓒ 황보름


a  아무도 없던 하도리 마을 근처 해변가

아무도 없던 하도리 마을 근처 해변가 ⓒ 황보름


하도리도 종달리와 마찬가지로 우리 이상 속 고향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하도리는 종달리보다는 더 빨리 개발바람을 맞고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 낮은 집들 사이로 불쑥불쑥 세련된 펜션들이 눈에 띠었다.

마을을 죽 둘러보다가 해안도로가 아닌 6차선 차도로 들어섰다. 제주에 와서 나는 뻥 뚫린 차도도 하나의 볼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대의 차도 없이 텅텅 빈 차도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다 후련해졌다. 좋은 절경 앞에서도 사진 찍는 것을 자꾸 깜짝하던 나는 이게 뭐라고 차도 사진만 몇 장을 찍었다.

a  보기만 해도 속이 다 훈련한 6차선 도로

보기만 해도 속이 다 훈련한 6차선 도로 ⓒ 황보름


풍경을 구경하듯 텅 빈 차도를 구경하며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걸었다. 그러다 다리가 풀릴 즈음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며 내심 바랐다. 오늘도 사장님에게 '고기 같이 먹으러 갑시다!'라는 전화가 오길.
덧붙이는 글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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