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잘 모르겠다'는 대법원, 항소심보다 더 끔찍하다

[주장] 허원근 일병 사망 사건 판결, 비겁하고 어처구니없다

등록 2015.09.12 13:48수정 2015.09.12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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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고(故)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원춘 씨가 지난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정 앞에서 허 일병의 군 의문사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국방부 조사본부의 조사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홍해인 기자 = 고(故)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원춘 씨가 지난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정 앞에서 허 일병의 군 의문사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국방부 조사본부의 조사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한 군인이 사망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2015년 9월 10일, 유족이 청구한 그 사건의 민사 소송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에서는 끝내 억울한 죽음으로 남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분노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었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 끝내 수수께끼로 남은 허원근 일병의 죽음).

사건의 시작은 1984년 4월 2일이었다. 이날 강원도 화천군 육군 7사단 소속 허원근 일병(1962년 5월생, 사건 당시 22세)이 숨진 채 발견된다. 현장으로 출동한 7사단 헌병대는 허 일병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린다. 중대장 전령이었던 허 일병이 중대장의 괴롭힘을 고발하자고 자신의 좌, 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1발씩 모두 3발의 총을 쏴 자살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여느 군 사망 사고처럼 잊힐 것이라 기대했던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의 자살을 인정할 수 없었던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와 국방부 사이에서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그것이 무려 만 31년째.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대표적인 군 의문사 사건 중 하나인 허원근 일병 사건을 돌아본다.

자·타살 논쟁, 31년간의 공방

1984년 자살로 '처리'된 허 일병의 사인을 처음으로 번복한 국가 기관은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였다. 2002년 9월 10일, 의문사위는 허원근 일병이 사실은 '타살'되었다고 밝힌다. 다음은 당시 의문사위의 발표 요지다.

'허원근 일병이 사망하기 전날인 1984년 4월 1일 저녁 6시부터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 2시 사이에 부대 간부끼리 술 파티가 있었다. 이때 부대 간부 사이에서 싸움이 났고, 그러다가 중대장에게 화가 난 노아무개 중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 일병이 있던 내무반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술에 취한 노 중사가 자고 있던 사병들을 깨워 행패를 부리자 이에 손아무개 사병이 반항을 했다. 이에 격분한 노 중사가 실탄이 장전된 M-16 소총을 들고 위협하던 중 누군가가 뒤에서 노 중사를 껴안으면서 말렸다. 바로 그때 방아쇠가 격발되면서 허 일병이 피격되었다.


이후 부대 측은 허 일병의 사망 사건을 자살로 위장한다. 이를 위해 처음 사고가 발생한 내무반이 아니라 추후 사체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폐유류고로 허 일병을 옮긴 후 누군가가 그곳에서 2발을 쏜다. 그런 후 내무반의 피를 지우기 위해 물청소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사위의 타살 발표를 국방부가 번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문사위가 허 일병의 사인을 '타살' 방향으로 조사하자 국방부 측의 대응은 대단히 파격적이면서 동시에 비상식적이었다.


국가 기관인 의문사위에서 조사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인데도 국방부는 허 일병 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를 시작한다. 그때가 2002년 8월 28일이었다. 당시 국방부 장관의 지시로 '국방부 허 일병 사망 사건 특별 진상조사단'(약칭 국방부 특조단)이 구성된 것이다. 허 일병 사망 후 4번째 자체 조사였다.

그리고 '허 일병이 타살되었다'는 의문사위 발표가 있고 약 두 달이 지나가던 2002년 11월 28일, 국방부 특조단은 약 석 달에 걸친 자체 조사 결론을 발표한다. 예상은 그대로였다. '자살'이었다.

유족을 더 공분케 한 것은 결과보다 그 내용이었다. 과거 이 사건을 부실하게 조사한 것으로 확인된 문제의 7사단 군 헌병대 최초 수사와 국방부 특조단의 발표 내용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방부 특조단이 발표한 수사 요지다.

'내성적인 성격의 허 일병이 중대장의 가혹 행위로 복무 염증을 느끼던 중 이러한 중대장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자살을 결심, 4월 2일 아침 10시에서 11시경 자살했다. 또한 현장에서 발견한 3발의 탄피는 모두 허 일병의 총기에서 발사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사건 당시 노아무개 중사에 의한 오발은 없었다.'

진실 찾아 법정으로 간 허 일병 사건

결국 유족이 희망을 건 곳은 대한민국 법정이었다. 법치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 아들이 어떻게 죽은 것인지 그 진실을 밝혀달라는 요구였다. 형식은 민사 소송이었지만 허 일병의 아버지는 돈이 아니라 아들의 명예를 찾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어진 지루한 법적 공방은 무려 3년이 걸렸다. 허 일병의 아버지에게 희망이 보였다. 2010년 2월 3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36부 김흥준 부장판사의 민사소송 1심 판결이었다.

이날 재판부는 "허 일병 시신에 대한 법의학적 소견,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증거 자료, 국방부 특별조사단의 수사 자료 등을 토대로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결과, 허 일병은 소속 부대 군인에 의해 타살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판결한 것이다. 사건 후 만 26년 만에 법원이 찾아준 진실이었다.

1심 재판부는 왜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바로 사망한 허원근 일병의 뇌 조직 물질이 움켜쥔 비밀 덕분이었다. 허 일병은 좌, 우 가슴과 머리에 각각 한 발씩 총을 쏴 자살했다고 했다. 이러한 총상으로 허 일병은 심각한 신체적 손상을 입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심각한 손상은 머리 부위였다. 이렇게 된다면 사건 현장은 어떨까.

당연히 허 일병의 사체 주변에는 부서진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직 물질이 흩어져 있어야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없었다. 좌우 가슴에서 흘러내린 상당량의 피도 거의 없었고, 특히나 두개골 조각이나 뇌 조직 물질 역시 전혀 없었다. 이러한 사실에 1심 재판부는 주목했다. 해외 법의학자에게 이 의혹을 의뢰했다. 그러자 그들이 보내온 답은 간결했다.

"피는 설령 땅에 스며들 수 있어도 뇌 조직은 땅에 스며들 수 없다."

즉, 총상이 있었다는 곳에서 이러한 신체 물질이 없다면 이는 허 일병이 사망한 장소가 아니라 누군가가 허 일병 사망 후 발견 장소로 사체를 옮겼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따라서 허원근 일병이 자살했다는 것은 사실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버지 허영춘은 그날 감회가 새로웠다고 한다. 그토록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시간에 비하면 얻어낸 결론은 미약한 진실이었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라고 여긴 것이다. 비록 범인을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또 남은 의혹을 전부 다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마침내 진실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 같은 민사 1심 판결에 대해 국방부는 예상처럼 반발했다. "사실 인정 및 법리상 오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가겠다"며 바로 항소한다. 그래서 열리게 된 2013년 8월 22일 민사소송 2심 판결일. 나는 이 사건의 2심 선고를 보기 위해 그날 서울 고등법원을 갔다.

민사 항소심 재판부의 비겁한 판결

a 유가협에서 아들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창신동 유가협 사무실에서 아들 허원근 일병의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유가협에서 아들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창신동 유가협 사무실에서 아들 허원근 일병의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 고상만


그 날, 법정에는 많은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허 일병의 아버지 역시 재판정의 제일 앞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서울 고등법원 민사 합의 9부 재판장이 법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려진 선고. 설마 했던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타살'로 인정됐던 1심 선고는 항소심에서 '자살'로 뒤집혔다.

1984년 당시 7사단 헌병대가 자살로 발표한 후 허 일병의 죽음은 모두 4번 자·타살을 오갔다. 그런데 이 날 다시 허 일병은 1심 '타살'에서 다시 '자살'로 원 위치했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자살로 결론을 내린 민사 2심 재판부의 판단은 1984년 7사단 헌병대의 수사 결과를 '사실상' 그대로 반복했다. 더 밝혀진 것도 없었고 새로울 것도 없는 31년 전, 바로 그 '자살론' 그대로였다.

먼저 "3발의 총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재판부는 "망인과 신체 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의 발사 자세를 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자세가 가능하니 자살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비슷한 체격의 남자가 시연하는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연자는 총기로 좌우 측과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 대기만 할 뿐이었다. 진짜로 좌, 우 가슴에 총상을 입고도 그런 상태에서 이마에 또 총을 쏠 수 있는지는 시연이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2번의 총상으로 가슴과 앞뒤로 4개의 큰 구멍이 생겼을 허 일병. 이 때문에 가슴뼈도 부러진 상태에서 재차 이마를 향해 또 총을 쏜다는 것이 가능하다며 자살이라는 재판부의 결론은, 어쩌면 신비하기까지 했다. 

이는 허 일병이 사망하고 이틀 후인 1984년 4월 4일 허 일병을 부검한 부검의의 의견과도 배치하는 판단이었다. 당시 박아무개 부검의는 2002년 국방부 특조단 조사에서 "허원근 일병의 죽음은 자살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고 진술한 바 있다.

그는 그러한 증거로 크게 3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허 일병의 좌우 가슴에 난 총상이 발생한 시간대가 크게 다르다는 판단이었다. 부검의는 허 일병의 우측 가슴에 먼저 총상이 났고,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난 후 좌측에 총상을 입은 것이라고 진술했다. 정상적인 자살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와 부합한다.

두 번째는 허 일병이 좌우 가슴을 쏘고 스스로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을 쏠 수 있냐는 상식이었다. 부검의는 좌우 가슴에 각각 한 발씩 총을 맞았다면 이미 폐가 손상돼 숨도 쉴 수 없고 또 과다 출혈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우측 이마 부위에 한 발을 더 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타살 증거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운 데 마지막으로 하나는 "현장 주변에 혈흔이 거의 없다면 그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라는 부검의의 진술이었다. 그러면서 부검의는 "적어도 자살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며 국방부 특조단에서 진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에도 국방부 특조단은 허 일병을 자살로 발표했다. 마찬가지로 민사소송 항소심 재판부 역시 국방부 특조단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결론으로 "허 일병은 자살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런데 나를 더욱 경악게 한 것은 민사소송 1심 재판부가 허 일병의 사인을 타살로 판단하는 데 중요하게 본 '뇌 조직 물질'에 대한 판단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 사건을 자살로 처리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결정적 한계가 나는 이 사라진 뇌 조직 물질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이 뇌 조직 물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 나라, 대한민국이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국가라면, 또 합리적인 상식을 가진 재판부라면 무엇으로 이 의혹을 피해 갈 수 있겠나'하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어처구니 없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해결 방안은 지극히 간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 현장에 피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땅에 스며들었다는 군 헌병대 조사 결과가 옹색하다 여겼는지 더 황당한 논리를 가져왔다.

그것은 "M16 소총의 회전력으로 혈액이 비산(날아서 흩어짐)하여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뇌 조직 역시 "그렇게 어디론가 날아간 것으로 판단된다"였다. 재판부는 그렇게 모든 의혹을 한꺼번에 해결해 버린 후 "자살이 맞다"며 유족에게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정말 그 판결을 들으며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의 위력이 보잘것 없어 무려 3번이나 총을 쏴야 사망할 정도였다면서 반면 피와 뇌 조직 물질은 그 총의 회전력으로 전부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중적 논리는 너무도 뻔뻔하고, 뻔뻔하며, 또 뻔뻔한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판결에 대해 허 일병의 유족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허영춘씨는 "국방부가 그동안 해 온 아들의 자살 주장을 항소심 판사가 그대로 말하더라"며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는 한 마디를 남긴 채 법정을 떠났다.

비겁하고, 어처구니없는 대법원 판결

그 항소심이 끝나고 약 2년 1개월이 지나간 2015년 9월 10일. 마침내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실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대법원 판결이 다가왔다. 하지만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던 순간은 그야말로 허탈하게 끝났다.

대법원의 판결은 민사 항소심 판결보다 더 끔찍했다. 결론은 "나도 잘 모르겠다"였다. 허 일병이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타살인지 우리도 잘 모르겠으나 다만 항소심이 내린 "군 수사기관의 부실한 조사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황당한 판결이었다.

너무나 비겁하고, 또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허 일병이 자살했는지, 아니면 타살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면서 반면 '자살을 인정한 항소심의 군 수사 기관 부실 조사만 인정'하는 교묘한 수법으로 대법관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질 비난 책임을 모면하려 했다.  

이러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그날, 허 일병의 아버지의 낙심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31년 전 그때, 아버지는 장남이었던 허원근 일병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허 일병이 사망한 4월 2일 다음날은 바로 허 일병의 첫 정기 휴가일이었다.

1983년 9월 28일,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는 아들 허원근을 전남 진도항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일이 바빠 같이 갈 수 없었던 아버지는 혼자 배를 타고 나가며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던 아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기 휴가를 받고 돌아올 아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 시각, 아들 허원근 역시 바빴다. 이제 다음날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만나러 나가는 첫 정기 휴가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 일병은 첫 휴가에 입고 나갈 휴가복을 빨아 놓았다고 한다. 멋지게 다려 입고 나갈 A급 군복이었다. 이어 허 일병은 소대장에게 휴가를 나가면 대신 집에 안부를 전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그런 허원근 일병이 첫 정기 휴가를 바로 하루 앞둔 그날,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몸에 무려 3번이나 총을 쏘아가며 모질게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유서도 없었다. 휴가때 입고 나가고자 빨아 놓은 휴가복만 남긴 채 그렇게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7사단 군 헌병대의 수사 결론이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무려 만 31년을 싸웠다.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 잠을 잔 것만 따져도 몇 년은 족히 될 험난하고 고된 싸움이었다. 누구처럼 민주화 운동으로 분신 자살을 한 것도 아니기에, 군에서 의문사로 죽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도 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아버지는 하루 하루 늙어가며 아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끝내 암을 얻었다. 하지만 암 수술을 받고 거동할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또 아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거리에서 또 잠을 자고, 새벽녘에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다시 죽인 재판, 바로 대한민국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다.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의 결정에 아버지의 심경은 설명할 길이 없다. 1983년 9월 28일 군에 입대한 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아들을, 또 아들은 아버지를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때 마흔다섯 살이었던 아버지는 올해 일흔여섯 살의 노인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이제 힘이 없다. 암 수술을 받은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또 어떻게 싸워야 할까. 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누가 풀어줄 것인가. 비통함이 하늘에 닿는 그 날, 바로 대법원이 판결로서 허원근 일병을 다시 죽인 2015년 9월 10일의 일이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허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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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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