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선씨가 1973년에 시작한 한일연탄보급소. 197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사왔다. 그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조심하며 일했다.
매거진군산 진정석
1936년, 동선씨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일정(일제강점기) 때였다. 여덟 살 때 들어간 '국민학교'에서는 일본말만 썼다. 조선말을 하면 일본 선생이 보자기를 씌워놓고 막 때렸다. 아침마다 조회시간에 신사참배를 하고, 일본에 충성해야겠다는 맹세를 일본말로 했다. 산수나 국어, 체조도 일본말로 된 교과서로 배웠다.
"3학년 때부터 집에 있는 놋그릇이나 놋수저를 학교로 가져오라고 합디다. 그걸 녹여서 무기를 만들라고요. 마초(말먹이)를 베어서 말려 갖고 오라고도 하고요. 광솔(소나무 송진)에 불을 붙이면 기름이 나와요. 그걸 짜오라고도 해요. 공부는 뒷전으로 그러고 있는디, 미군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독립운동을 해 가지고 해방이 된 거예요." 해방을 맞은 그해 11월, 동선씨네 식구들은 군산으로 이사 왔다. 외할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서였다. 소년 동선은 군산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년제이던 사범학교에 지원했다. 졸업하면 바로 교사가 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경쟁률은 치열했다. 13대 1, 그는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금을 못 낸 소년은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열네 살 소년은 집안일을 하고, 할아버지 병간호를 하며 1년을 지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등록금 없어서 학교 못 간 게 억울하니까 다시 사범학교 시험을 치라고 했다. 소년은 또 합격했다. 소년의 이모부는 경성고무, 한국합판 같은 기업체에 찾아가서 "사범학교에 두 번이나 합격한 아까운 사람입니다"라면서 입학금 3만 원을 모금했다.
"열다섯 살에 사범학교 1학년이 됐는데 6·25 사변이 터졌어요. 난리가 났어요. 인민군들은 해망굴에 있고, 학교는 피난민들 수용소가 됐어요. 공부도 제대로 못 했죠. 전쟁을 3년간 하고 휴전협정을 맺었는디 국가적으로 혼돈 상태였고, 저 자신도 그랬어요. 수업료를 못 내서 쩔쩔매고, 당장에 밥도 못 먹으니까요. 우선은 생명이 있어야 하잖아요. 3학년까지 포도시 댕기고는 학업을 포기했어요. 동생이 다섯 명인데 그 애들이나 잘 가르치자고요." 동선씨는 열여덟 살 때 북선제지(이후 고려제지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페이퍼코리아)에 입사했다. 그때 북선제지는 전국에서 신문용지 생산을 가장 많이 하던 회사였다. 20년 이상 된 소나무를 산에서 채벌해 화물기차로 실어오면 빠르뽀(종이) 원료를 만들어서 신문 종이를 만들었다. 그걸 전국으로 보내기 위해서 기차가 분주하게 오갔다. 그 길이 지금의 구암동 철길마을이다.
그는 종이 만드는 기계가 고장나면 고치고 수리하는 설계공작과에서 일했다. 13년간 회사 다니면서 번 돈으로 동생들 학비 대고, 생활비로 썼다. 저축은 못 했다. 북선제지는 군산에서 높이 쳐주던 회사, '결혼 제의'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동선씨는 장남, 집안 형편을 생각했다. 동생 둘을 먼저 시집장가 보냈다.
"1967년도에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그만뒀어요. 그 뒤로 6년간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러고 사는디 동생이 연탄 일을 하자고 해요. 그때는 석유 보일라 발명이 안 됐어요. 장작을 때니까 삼림이 다 훼손됐고요. 정부에서 삼림녹화 사업하면서 연탄 권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다들 연탄만 의지하고 살던 때였어요. 군산에도 연탄공급소가 100곳이 넘었습니다."고생했다고 점심상 차려주는 이도... "좋은 사람 참 많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