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때부터 중화요리를 배운 도유덕씨. 그가 만드는 고추짬뽕과 고추짜장면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매거진군산 진정석
"유덕아, 너는 커서 뭐 헐래?" "장관이요. 그거 되고 싶어요." "그러믄 역사책이랑 많이 읽어야겄다."
아버지는 유덕에게 18권짜리 역사책 전집을 사 주었다. 열한 살 소년이 전집을 절반쯤 읽었을 때, 아버지는 쓰러졌다. 어머니는 "논 한 필지(1천 평) 팔아서 간호하면 병을 다 고치겠지" 하며 논을 팔았다. 치료비는 계속 들었다. 논 여덟 필지를 팔고, 산을 다 팔아도 아버지 병은 차도가 없었다. 남은 건 집 한 채와 논 한 필지뿐이었다.
몸져누운 아버지는 장남인 유덕에게 "학업을 계속해라"고 했다. 유덕도 그러고 싶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학교 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기울어만 갔다. 혼자 농사지어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유덕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는 마흔아홉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1979년, 어머니와 9남매만 남았다.
19세에 시작한 중화요리... 동생들 생각에 이 악물고 버텼다"열아홉 살에 일을 시작했어요. 전주 공업사 옆에 조그마한 중화요리점 하나가 있었어요. 거기가 사촌형네 집이에요. 내가 일을 하니까, 형이 우리 집에 생활비를 보냈어요. 내 용돈도 좀 주고요. 형이 먼저 '수타'를 가르쳐줬어요. 내가 키도 크고 덩치도 좋으니까 면이 많이 나오겄다 싶어서요. 원래는 주방에서 허드렛일 하고, 양파부터 까야 하는디요."유덕씨는 오전 5시에 일어났다. 연탄불에 조리를 하던 시절이라서 불부터 피웠다. 수타면을 맛있게 만들려면 반죽을 잘 치대야 했다. 서른두 살인 사촌 형은 엄격하게 가르쳤다. 유덕씨가 잘 못하면, 그 자리에서 때렸다. 일하기 싫었다. 그러나 공부 시켜야 할 동생들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는 오로지 중화요리점 주방에서 살아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칼질까지 배운 유덕씨는 짜장면 만드는 기초를 배웠다. 그때는 가게마다 춘장을 담그던 시절. 손님 그릇에 담아주고 남은 면은 삭혀서 콩가루와 소금, 캐러멜을 넣어서 항아리에 저장했다. 3개월쯤 지나면 춘장이 됐다. 한 번은 유덕씨가 춘장을 제대로 못 만들어서 맛도 이상하고, 곰팡이가 피었다. 사촌형한테 엄청나게 혼났다. 그 와중에도 유덕씨는 말했다.
"형, 우리 이거 하지 말지? 춘장도 다 기계로 자동화 돼서 나와요. 짜장 맛은 전국이 똑같을 거 아니에요?""네 말이 맞다. 사서 쓰자."
일은 오후 11시에 끝났다. 가게에는 딸린 방이 없었다. 그는 식탁 위에 이불을 깔고 혼자서 잤다. 유덕씨의 친구들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가고, 군대에 갔다. 스물다섯 살이 된 유덕씨는 여전히 사촌형 가게에서 일했다. 하고 싶은 일을 참고만 사는 유덕씨는 친구들 사는 모습이 부러웠다.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피했다.
"연탄 대신 석유 빠나(버너)에 음식을 하는 시대가 됐어요. 주유소에 기름 달라고 주문 전화를 걸으니까 받는 사람 목소리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임실 사는 아가씨래요. 그 아가씨 꼬실라고, 만두도 자주 싸서 보냈어요. 한 번은 일 끝나고 주유소로 간다고 말했어요. 근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을 못 하겄는 거예요. 얼굴만 보고 집에 와서 누웠는디 딱 얼굴이 아른거려요. 그렇게 천사 같은 여자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