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시대에는 운하를 통해 강남의 물자을 중원으로 이동하는 화석강이 모순의 결정체이었다. 사진은 지금도 물류수단으로 활용 중인 강소 성 상주의 경항운하.
최종명
방랍의 민란 소식을 듣자 남쪽 처주(处州, 현 절강 여수丽水)의 농민을 비롯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항배상망(项背相望)하듯 전투에 참여했으며 구주(衢州)의 마니교(摩尼教) 조직도 군사를 일으켜 호응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예언자 마니에 의해 탄생했으며 비교적 체계적인 우주론에 입각해 인간의 운명을 조율하는 종교적 구원으로 3세기에서 7세기에 융성했으며 경전의 세계적 번역에 따라 위구르어와 중국어로 번역돼 전해졌고 위구르민족의 국교로 성장하기도 했다. 8세기 중반 안사의 난으로 혼란하던 당 대종(代宗) 시기 중국으로 전파된 마니교는 16대 무종(武宗)에 이르러 종교 활동이 금지됐다. 이후 비밀리에 전파되던 마니교 조직은 14세기에 이르러 사라지기 전까지 고통받던 농민의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지지를 받았다.
보통 명교(明教)라고도 부르는데 김용 무협소설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조직적인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명교 조직이 처음으로 민란에 참여한 것은 오대의 후량 시대 920년 진주(陈州, 현 하남 회양淮阳)에서 봉기한 모을(母乙) 민란으로 알려져 있다.
방랍을 주모자로 한 민란군은 바야흐로 강소, 절강, 안휘, 강서 일대의 6주, 52현을 일시에 평정해 권력을 틀어쥐니 송나라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되고도 남았다. 드디어 승승장구하며 항주를 점령해 고위 관리들의 수급을 거두는 한편 당시 전국적인 원성의 대상이던 재상 채경(蔡京)의 조상 무덤을 도굴해 해골을 부관참시하고 백성의 원성을 어루만지니 민란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이때 한 태학생(太学生)이 천하를 군림할 자리에 오를 계책이라며 먼저 강녕부(江宁府, 현 남경)로 진공해 장강의 요새를 점령한 후 관군의 도강을 저지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다. 방랍은 '천하가 부패해 백성이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나선 것이지 천하를 주무를 수 없다'며 어쩌면 '천자'를 위한 전략적 방향이었을지 모를 건의를 듣지 않았다. 역사에서는 언제 어디로 군사를 움직일지에 대한 전략의 선택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순간의 선택이란 늘 어려운 것인가 보다.
방랍이 항주 서남부 무주(婺州)와 구주로 군사를 이동하자 토벌군도 동관(童贯)과 담진(谭稹)을 대장으로 15만의 수륙 양군을 동서로 나누어 항주와 섭주로 진격해 왔다. 1121년 1월에 방랍은 북상을 결정하고 오른팔 대장군인 방칠불(方七佛)을 파견해 숭덕(崇德) 현을 함락시키고 항주 동북부에 위치한 수주(秀州, 현 가흥嘉兴)를 지나 후주(湖州)로 진격해 왕품(王禀)이 이끄는 동로군과 격전을 벌였지만 참패해 항주로 후퇴하고 말았다. 식량 보급이 단절되자 항주를 버리고 후퇴했다가 3월에 이르러 다시 항주를 공격해 성밖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왕품 군대에게 참패했다.
항주를 잃은 후 국면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더니 유진(刘镇)이 이끄는 부대에 의해 섭주를 점령 당하는 등 차곡차곡 주변 현들을 내줬으며 4월에는 구주의 마니교 교주 정마왕(郑魔王)이 생포됐다. 거듭 승리하던 민란군은 점점 거듭 패배하고 말았으며 방랍은 후퇴를 거듭해 결국 최초의 근거지 청계 현으로 돌아왔다. 이때에도 방랍의 군사는 20만 명에 육박했으나 전투력은 크게 떨어져 관군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후에는 방원동(帮源洞)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1121년 4월 토벌군이 방원동을 포위했으나 방랍의 군사들은 모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천혜의 동굴 속에 숨어 버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령을 엄호하는 비장(裨将)에 불과하던 한세충(韩世忠)이 동굴의 침투경로를 찾아내 방랍이 숨은 곳을 찾아내 수천 명을 격살하고 민란 주모자들을 생포했으며 동굴 속에서 반항하던 7만 명의 군사를 살해했다고 하니 그 참혹을 연상하기조차 끔찍하다. 방랍 등 주모자급 52명은 수도 변경(汴京, 현 개봉开封)으로 압송돼 8월 24일 사형에 처해졌다. 비록 민란의 주모자이자 영수가 사망했으나 도주했거나 남았던 이들은 절강성 곳곳에서 1년여를 더 항쟁을 벌였다. 비록 장기적인 민란은 아니었지만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등에 업고 강남 일대를 섭렵했으니 <송사>에서도 방랍 열전을 따로 둘 만했다.
천 년이 지나도 씻기지 않을 22m 깊이의 방원동은 방랍동이라 개명됐으며 피비린내를 안타까워 한 것인지 방랍이 품었던 민란의 뜻에 공감한 것인지는 몰라도 흔쾌히 써 내린 곽말약의 '방랍동'은 아담한 비석이 되어 동굴을 지키고 서 있다.
여진족 금나라는 북송을 남쪽으로 쫓아내다방랍과 양산박 민란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송나라는 여진족 금과의 동맹을 맺어 거란족 요를 물리치려 했다가 오히려 강력한 여진족을 중원으로 끌어들이게 됐다. 여진족은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요를 서쪽 중앙아시아로 쫓아내더니 1126년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해 화의가 성립됐다. 송 조정은 어설프게 내부교란을 획책하다가 나라를 잃었고 태상황 휘종과 흠종을 비롯 3천여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지변(靖康之變)을 당하고 말았다.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赵构)가 응천부(应天府) 상구(商丘)에서 왕조를 복원했다가 여진족의 공격을 받자 장강을 넘어 임안(临安, 현 항주)으로 수도를 옮겼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남송이라 불렀다.
여진족이 남하해 중원을 점령하자 송 조정의 탐관부패 정권의 수탈 못지 않게 농민들의 고충은 커져갔다. 민란의 성격에 민족항쟁의 기치를 올린 항금 민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1127년 장령이던 왕언(王彦)은 태행산 太行山에서 농민을 동원해 민란을 일으켜 하남과 섬서, 사천 지방으로 이동하며 항금 민란을 주도했는데 '나라에 충성하고, 금나라 도적 살해를 맹세한다(赤心报国,誓杀金贼)'는 8글자를 새겼기에 팔자군(八字军)의 항금 민란이라고 불렸다. 소흥(邵兴, 현 산서 운청运城)에서도 농민들은 군영을 설치하고 여진족의 침공으로부터 스스로 운명을 보호하고 나서는 등 중원 곳곳은 민중 항거와 민족 항쟁이 결합된 민란이 발생했다.
항금 민란은 당시 사회 저변에 광범위하게 조직돼 있던 명교, 미륵교, 백련교 등 종교집단의 항거를 촉발하기도 했다. 1127년 그들은 산서와 하북 일대에서 붉은 깃발을 들고 붉은 두건을 쓰고 등장해 '홍건군' 또는 '홍군'이라 불렸는데 이후 13세기 초에 이르러 보다 조직적인 항거로 발전했다.
불 난 틈에 도적질 하다니... 평등의 나라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