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강남 압구정동의 모습. 한편에서는 농부가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서울역사박물관
[탈출의 기호 - '한남대교'] 1966년 박정희 정권은,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계획'을 발표한다. 당시 강남은 인구 2만 명 미만의 변두리 농촌이었음에도(서울 통계정보 시스템에 따르면, 2015년 3/4분기는 약 58만 명), 한남동과 신사동을 잇는 다리가 건설된다는 건 군사적 의미가 컸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 3일 만에 이승만 정권은 한강 다리를 끊고 도망쳤고, 서울시민들은 석 달간 인민군의 통치 아래에 놓였다.
시민들의 정신적 외상은 전쟁 이후에도 깊게 남았지만,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다리의 수는 부족했다. 1964년 베트남 파병 이후 안보 불안이 고조되고,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이나 푸에블로호 사건 등이 일어나며 안보 불안은 더 심해졌다. 강북에 집중된 기능을 분산시키고, 교통·주택난을 해결할 필요도 있었으므로1970년대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의 시기가 됐다.
[욕망의 기호 - '현대아파트'] 개발독재를 '좋았던 시절'이라 부르며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강남 개발 같은 대규모 사업을 거론하며 박정희의 치적을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업들은 오늘날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담보로 이뤄졌다. 강남 개발 당시, 박정희 정권은 개발 비용을 들이지 않으려고 '체비지 장사'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강남에 땅을 소유했다고 하자. 그런데 도로개발 계획으로 일부를 내놓으면, 재산도 감소한 걸까. 아니다. 도로가 들어서 땅값이 내놓은 땅의 값어치를 상회할 만큼 오른다면, 손실을 메꾸고도 남는다. 개발사업자들이 원 토지 소유자가 내놓은 땅 중 일부만을 사용했다면, 미사용 토지가 바로 '체비지'이다.
개발사업자들은 이 체비지를 팔아 개발비용을 충당했다. 이 방식은 박정희 정권이 공공투자를 아껴 도시개발을 거저먹는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체비지가 팔리지 않는다면 사업이 진행되지 못한다. 정권은 체비지가 많이 그리고 비싸게 팔리도록 발 벗고 나서 땅장사를 조장했고, 부동산 투기를 불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