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한일협상에 대한 소고

[주장] 시민사회의 창조적인 역할의 필요성

등록 2016.01.10 09:34수정 2016.01.12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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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가을, 일본 외무성 산하 연구소인 일본국제문제연구소의 방문연구원으로 도쿄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논문에 필요한 인터뷰를 담기 위해 일본 외교관들과 한일관계를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들을 주로 만났는데,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언급했던 사안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걸프전.

그 당시 일본은 미국과 다국적군의 강력한 요청에도 자위대 파견을 거부합니다. 자위대는 말 그대로 일본의 방위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법적정의에 입각한 결정이었습니다. 그 대신 일본은 13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지원합니다. 하지만 걸프전이 마무리 되고 다국적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쿠웨이트의 공식성명에 일본은 제외됩니다. 뿐만 아니라 서방 국가들로부터 '수표외교 (checkbook policy)'라는 신랄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제가 만났던 인터뷰이들은 그 당시 일본 정치리더들이 느꼈던 굴욕감이 대단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전 그 부분에서 이해가 잘 가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치리더들이 느꼈을 굴욕감이 말이죠. 그리고 이런 저의 의문은 일본의 국가정체성을 연구해 온 타마모토마사루 교수를 만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타마모토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정치리더들의 대부분은 '평화국가' 라는 정체성을 단 한 번도 수용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평화국가' 라는 국가 정체성이나 그 정체성의근간이 되어왔던 '평화헌법'은 일본이 자발적으로 만들고 지켜온 것이 아닌 '외부세력(미국)에 의해 강요된' 정체성이자 법률로, 오히려 일본의 (그것이 군국주의가 됐든 아니든 주권과 밀접하게 관련된) 고유한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매개체로 인식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평화국가'로써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국가정체성이 계발될 여지가 없었다는 거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평화국가'라는 가치가 일본시민들에겐(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제외하고) 하나의 정체성으로 형성되어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정치리더들과 시민들 사이의 이와 같은 인식의 '간극'이 사실 일본의 '군사화'를 제어하고 있는 브레이크가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번 한일간 위안부 협상을 지켜보면서... 동아시아의 평화공동체에 대한 소망이 있는 저로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해결과 더 나아가 한일관계의 회복, 중일관계 회복의 촉진자 역할을 대한민국이 하기 위해선 시민사회의 보다 창조적인 역할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그 차디찬 길바닥 위에 앉아있는 대한민국 시민들, 특히 대학생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동력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다만, 그 정의와 존엄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건설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그래서 한일 모두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타결안이 나올 수 있도록 물길을 내어주는 역할을 (정부가 하지 않는/못하는 상황인 지금) 시민사회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과 일본은 상당히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나라들입니다. 그것은 양국 시민들의 목소리가 정부의 외교정책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일본 내 '평화국가'의 정체성을 잃고 싶어 하지 않는 시민들과의 연대를 역설하는 이유입니다.
#위안부 한일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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