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공산성이 있었던 팔공산 비로봉의 모습. 부인사 뒤편 서봉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부인사와 서봉까지는 3.34km.
정만진
그런가 하면, 이주의 <태암집>에 '(정사철이) 아들 정광천을 팔공산에 보내어 서사원, 이주, 채응홍, 서행원, 이상문, 은복홍 등과 창의를 논의하게' 한 날짜가 6월 1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당시 대구 지역 유림의 최고 지도자였던 63세의 정사철이 5월 28일보다 불과 사흘 뒤인 6월 1일에 그같은 조치를 취한 것은 '5월 28일 부인사 회동'에서 창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구본욱의 논문 <대구 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은 <태암집>의 기술을 근거로 '팔공산으로 피란을 온 대구 지역의 인사들은 5월 28일에 이르러 팔공산 부인사에서 회합하여 창의를 발의하였다'고 규정한다.
개별 창의는 진작부터 시작되었지만 5월 28일에는 대구 전역을 아우를 수 있는 대규모 창의를 위한 결의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다. 이날의 의의를 구본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대구 지역의 의병은 다른 지역과 달리 개별적인 의병 활동보다는 대구의 전 지역에 의병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향회(鄕會, 대구 유림 총회의 의미)를 개최하여 공산의진군(公山義陳軍, 팔공산에 본부를 둔 대구 의병 총군)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원동력은 임진란 이전에 연경서원 등의 강학을 통하여 형성된 인재들의 존재였다. 대구 선비들, 5월 28일 대규모 창의 결의구본욱의 논문에 정리된 바를 따르면, 대구 지역의 대규모 창의 준비는 5월 28일 이후 계속된다. 6월 2일 서사원, 정광천, 서행원, 이주, 은복흥 등은 동화사에 머물고 있는 대구부사 윤현을 만나 창의 문제를 논의한다. 이들은 그후 곽재겸, 손처눌, 전길, 이상문, 채몽연 등과도 의병을 일으킬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6월 14일에는 서사원, 유요신, 서사술 등이 팔공산 정상 공산성에 많은 피난민들이 올라와 있는 광경을 살펴본다. 그리고 6월 22일, 6월 27일, 6월 28일에도 많은 선비들은 동화사에 모여 의병 창의를 논의한다. 동화사에서 회의를 가졌다는 것은 이때 대구부사도 이 논의에 줄곧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 사이 6월 22일에는 김면의 의병 격문이 부인사에 도착했고, 곽준, 문위, 이승이 연명으로 작성한 통문도 왔다. 26일에는 경상도관찰사 김수가 보낸 관문(關文, 공문)도 왔다. 이윽고 7월 1일 서사문이 의병 창의를 외치는 격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 초안을 작성했고, 그 이튿날 초안을 팔공산 주변의 유력 가문에 회람시켰다. 초안을 유력 선비들에게 두루 읽힌 것은 '중지를 모아 결속력을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우인수 논문 <대구 지역 임란 의병의 성격과 선비 정신>).
▲부인사의 서탑(유형문화재 17호). 그러나 이 탑은 대구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부인사에 모여 있던 1592년 당시에는 무너진 채 땅에 뒹굴고 있었을 듯하다. 이 탑이 복원된 것은 1964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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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7월 6일, 부인사에서 향회가 열렸다. 이날 격문과 '향병 입약(鄕兵立約, 의병 참가자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확정짓고, 의병장을 비롯한 참모진 구성에 대한 인선을 했다. 선비들은 대구 지역 전체 의병을 이끌 향병대장(鄕兵大將, 의병대장)으로 정사철을 선임하는 등 모두 49명을 주요 직책에 배치했다(대구의 의병대장은 의병장들이 남긴 문집에 '향병대장'으로 나온다. 우인수는 '당시 상당 지역의 의병들은 스스로를 의병으로 자칭하는 것이 외람되다고 생각하여 향병으로 자칭했다'고 보았다).
▲김성일의 서명(안동 국학진흥원 게시)
안동국학진흥원
최계는 1591년 무과에 급제한 26세의 젊은 장수였다. 우인수는 '의병장은 군대를 직접 이끌고 앞장서서 싸워야 하는 자리여서 (김성일이) 무과 출신의 용력이 있는 사람을 임명한 듯하다'고 본다.
또 '소모관과 유사는 대구 지역의 명망있는 가문의 인사들로서 대구 지역 사족들을 모두 아우르는 차원에서 진용을 짠 듯하다.
초유사 김성일의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부분'이라고 해석한다. 김성일이 보내온 공문의 인선은 <정만록>에 실려 있는 그 자신의 장계 중 '신(김성일)이 각 읍에 통문하여 그 자제들 중에서 유식한 자를 가려서 소모관으로 삼고, 무관들 중에서 가장으로 삼으라고 하였삽더니(하략)' 라는 대목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구부의 의병진이 자체적으로 완성되어 일이 상당히 진행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초유사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기가 어려웠다. 이에 (부인사 의병소에서는) 초유사에게는 8월 4일 양해를 구하는 답서를 보내 상황을 설명한 듯하다.' (<낙재일기> 8월 4일자에 '답장을 써서 초유사에게 올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성일도 대구 지역에서 자율적인 향회를 통해 인선을 끝낸 의병진에 대해 이런저런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63세의 고령이었던 정사철이 병으로 직책을 수행할 수 없어 스스로 사양하자 7월 18일 서사원이 후임자로 정해졌다.
당일 일기에 '(선비들이)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정상사(鄭上舍, 정사철)를 대신하라'고 하였으므로 '사양하였지만 부득이 (향병대장을) 맡았다'고 기록했던 서사원은 왼팔 마비 현상이 나타나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였지만 승중손(承重孫, 아버지를 여읜 뒤 조부모의 타계를 맞이한 손자)으로서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되는 8월 29일까지 향병대장으로 활동했다.
조부모, 부모 별세로 연이어 의병대장 사임서사원의 뒤를 이어서는 손처눌이 1593년 2월 부친상을 당할 때까지 향병대장을 맡았다. 손처눌은 '대구 향병의 창의가 일어날 당시 수성현 한 지역을 맡는 의병장으로 임명될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욱이 의병 초집 활동과 관련하여 매우 성의있는 태도와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서사원과 의기투합한 바 있던 인물'이었고, '그 이전부터 서사원과는 학문적으로 대구 지역을 대표하던 존재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사원에 이어 의병장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우인수 논문)'
손처눌의 뒤를 이어서는 이주가 1595년 2월 모친상을 당할 때까지 직무를 수행했다. 이주가 자신의 <태암집>에 남긴 '내가 본래 재주가 없는데 홀로 여러 일을 거느리자니 "사람은 가벼운데 책임은 무겁다"는 탄식을 감당할 수 없다'라는 소감은 '임진란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과 이주의 고뇌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구본욱 논문)'
결과적으로 대구는 의병 창의가 매우 늦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경산 시지>의 '경산, 하양, 자인 지역은 여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빨리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대구, 경주 등지가 적에 의해 장악되어 의병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것과 달리 이 지역은 적이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으나 주둔하지 않아 의병 모집이 상대적으로 쉬웠기 때문'이라는 기술이 참고할 만하다. 또 최효식의 논문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 항쟁>에도 '왜적의 주력 부대가 이곳을 통과하였고, 후방 보급로로 많은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으로 분석되어 있다.
▲손처눌을 모시는 청호서원(사진 왼쪽, 대구 수성구 청호로 250-11, 황금동)과 이주를 모시는 서계서원(대구 북구 호국로51길 45-17, 서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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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욱과 우인수의 견해도 이들과 일치한다. 구본욱은 논문 <임진란 이후 대구 지역의 전후 복구와 사회 재건>에서 '대구 지역에서 의병의 결성이 늦어진 이유는 부내(府內, 대구 시내)가 일찍이 왜적들에게 점령을 당하여 서로 교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우인수도 '일찍 의병이 일어난 지역보다는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역마다 여건이나 처지가 달랐기 때문에 창의 날짜만 놓고 단순 비교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대구는 주통로상에서 침략을 혹심하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점령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지역이었다.'고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병은 큰 의의가 있었다그러면서도 우인수는 '구심점이 되는 수령(대구부사)이 군사를 거느리고 관내에 건재해 있는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감안한 상태에서 (대구 지역의 의병 창의가 늦은 사정을)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다른 지역들은 수령이 도망가고 없고 관군도 해산한 지경이었지만 대구는 관군이 건재하고 부사가 지역 유력 인사들과 팔공산에 함께 있었으므로 자연스레 창의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대구 동구 망우당공원에 1998년 세워진 임란호국영남충의단. 단기(壇記)에는 '숨겨진 영남 호국 충의사를 찾아' 270여 위패를 충의단 감실 안에 모시고 있다는 내용을 새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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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인수 논문의 마지막 결론을 읽는다. 우인수는 '대구 의병의 전공이 혁혁하지는 않았지만 의병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일본군을 견제하는 효과는 충분하였다. (중략) 관민이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대구 지역을 떠나지 않고 머물면서 부민(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구본욱의 <대구 유림의 임진란 창의와 팔공산 회맹>도 대구 선비들의 부인사 창의가 가지는 의의를 두고 '공산의진군은 부인사에 의병을 두고 동화사의 관군과 유기적인 연락을 취하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래서 정유년(1597) 이전에는 왜적들이 팔공산 안으로는 침입하지 못하였다.'라고 평가한다. 팔공산 골짜기와 정상 공산성으로 몰려들었던 대구 부민들이 부인사에 본부를 둔 공산의진군의 활약에 힘입어 무사하였다는 것이다.
부인사! 공산의진군의 존재와 의의에 대해 알고난 뒤 다시 보면, 선덕여왕과 대장경에 이어 임진왜란과 관련해서도 꼭 찾아보아야 할 중요 유적지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부인사 대웅전 지붕 위로 아스라히 보이는 팔공산 정상도 지금껏 무심히 관상해 오던 것과 다르게 느껴져, 아련하게 흘러가는 하얀 구름마저 된바람 휘몰아치는 한겨울을 그곳에서 사뭇 떨며 지냈던 조선 백성들의 창백한 얼굴빛으로 느껴진다. 그래서인가, 문득 팔공산 비로봉의 청색 그림자가 내려오더니 부인사 범종각을 등진 채 하염없이 서 있는 내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임진왜란 당시 대구부사와 관군이 머물렀던 팔공산 동화의 대웅전. 부인사에 머물면서 의병 창의를 논의했던 대구 선비들은 종종 동화사에서 회의를 가졌는데, 이는 대구부사가 의병 창의 과정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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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사 답사 순서 |
(1) 주차장 위 부도 감상, 부도(유형문화재 28호)의 주인 승려의 호 '隱通堂' 찾기, 안내판 읽기 (2) 주차장과 부인사 사이, 거대한 고목들 아래의 '부인사 터' 석재들을 돌아보며 몽고군의 침략과 소실된 초조대장경 생각해보기 (3) 석재들 오른쪽의 사찰 정면으로 들어가 (안내판을 읽으며) 서탑 보기(유형문화재 17호) (4) 하얀 화강암으로 된 동탑을 보며 문화재의 시간적 가치에 대해 생각 (5) 쌍탑과 종무소 사이에 있는 (안내판을 보며) 석등 보기(유형문화재 16호) (6) 경내로 들어가 명부전 앞 (안내판을 보며) 일명암터 석등(문화재자료 22호) 보기 (7) 범종각 옆에 서서 팔공산 정상(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피란을 갔던 공산성)을 바라보며 전쟁의 문제점, 의병 창의 정신에 대해 생각하기 (7) 숭모전을 둘러보며 선덕여왕 생각하기 (음력 3월 15일이면 숭모전 내 여왕 초상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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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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