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의 검은 성모상, 왜 만들어졌을까

[룩셈부르크 기행 ⑦] 아름다운 마을, 그룬트 기행

등록 2016.02.19 10:40수정 2016.02.1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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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구시가는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높은 성벽의 요새도시라는 구조적 특성 때문에 구도시 도심과 외곽은 높낮이가 현격하게 다르다. 구도심을 조금 벗어나서 철벽처럼 구도심을 둘러싼 보크 포대(Casemates du Boke)에 와서 보면 방금 서 있던 평지가 마치 고원지대처럼 올려다 보인다.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온한 주택들이 줄을 잇는 저지대 마을이 있고 무성한 나무들이 자라는 숲이 펼쳐진다.  

그룬트. 룩셈부르크 저지대 마을에 중세시대의 주택들이 절경을 뽐낸다.
그룬트.룩셈부르크 저지대 마을에 중세시대의 주택들이 절경을 뽐낸다.노시경

절벽이 워낙 높은 데다 절벽 아래에도 사람 사는 마을이 펼쳐져 있어서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하다. 절벽 아래의 집과 강 그리고 성당이 한 눈에 보이는 전경은 나의 발길을 절벽 아래로 향하게 한다.


내가 가려고 하는 아랫마을은 바로 '땅', '바닥'이라는 뜻을 가진 그룬트(Grund)이다. 그 땅은 해발고도 300여m의 사암 절벽 아래에서 알제트(Alzette) 강과 페트루세(Petrusse)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구시가 남쪽 외곽에 그룬트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그런데 길을 가다보니 그룬트의 집들이 언덕을 따라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언덕길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취한 듯 그 언덕길을 따라 내려갔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걸으니 주택들의 회색 지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룬트의 주택. 지붕의 푸르고 흰 지붕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룬트의 주택.지붕의 푸르고 흰 지붕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노시경

그룬트의 집들은 다른 유럽 국가의 집들과는 달리 지붕이 모두 푸른빛이 감도는 짙은 회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짙은 회색의 깔끔한 지붕은 아름다운 데다가 마음까지 차분하게 해 준다. 집들의 외형은 화려한 장식이 없이 간결하며 밝고 은은한 색상의 외벽은 단정한 느낌을 준다. 지붕을 보며 걷는데 마음이 흡족해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 마을로 들어서면서 내가 과거 중세 유럽 속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절감하게 된다. 

그룬트 언덕길. 요새 절벽에서 그룬트로 이어지는 언덕길이 운치 있게 다가온다.
그룬트 언덕길.요새 절벽에서 그룬트로 이어지는 언덕길이 운치 있게 다가온다.노시경

나는 언덕길의 주변 집들을 구경하며 내려오다가 언덕길이 지그재그로 꺾이는 중간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게 하는 전경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보크 포대와 아랫마을인 그룬트의 절경이 함께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그룬트를 내려다보는 벤치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벤치에 앉아 다리를 쉬었다.

나는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룬트를 배경으로 한 나만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파노라마 모드로 주변을 한 바퀴 돌아가며 사진을 남겼다. 이곳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자연스러운 압박감이 머리 속에서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벤치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오늘 쉬지도 않고 계속 걸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웬일인지 멈춰 있고 싶은 마음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춘 후 그룬트의 절경을 관조(觀照)했다.

여러 곳을 둘러보러 오는 외국 여행이지만 이렇게 움직이지 않고 쉬는 게 왜 이리 소중하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오래 달리기를 멈춘 후 나오는 기쁨의 호르몬 같은 것이 점점 몸 안에 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아내와 딸의 얼굴이 자꾸만 머리 속에 떠올랐다.


엘리베이터 터널. 암벽을 뚫은 터널이지만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인해 분위기가 밝다.
엘리베이터 터널.암벽을 뚫은 터널이지만 어린이들의 그림으로 인해 분위기가 밝다.노시경

기력을 회복한 다리를 다시 움직여 그룬트 마을이 있는 저지대까지 완전히 내려갔다. 낮은 땅의 평지에 다다르자 방금 전까지 내가 찾았던, 그룬트 행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엘리베이터는 저지대인 그룬트에서 룩셈부르크 시티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이기도 하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까지는 터널 같은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암벽을 뚫은 터널이지만 분위기는 전혀 음침하지 않고 밝은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곳에는 룩셈부르크 초등학생들이 그린 앙증맞은 그림들이 천장과 벽면을 온통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후에 돌아올 길을 익혀두기 위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잠시 구시가로 올라가보았다. 얼마 전에 답사를 한 곳이라 예상은 했지만 그룬트와 전혀 다른 번화한 구도심이 눈앞에 딱 나타났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니 이번에는 중세시대의 주택들이 수면을 취하는 것 같이 조용한 그룬트가 떡 나타났다.

엘리베이터 터널을 나오면 바로 앞에 업다운 바(updown Bar)가 있다. 오래되고 조용한 주거 지역인 그룬트에서 몇 안 되는 식당이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식당 앞을 오고 가기 때문에 이 식당은 그룬트에서 유일하게 사람들로 붐빈다.

아직 저녁식사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친구들과 함께 맥주 한 잔씩을 즐기는 주민들로 시끌벅적하다.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서 룩셈부르크 인들은 식당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는 것 같다.

알제트 강. 그룬트를 휘감아 도는 알제트 강변의 모습이 적막하고 한가하다.
알제트 강.그룬트를 휘감아 도는 알제트 강변의 모습이 적막하고 한가하다.노시경

그룬트 마을 앞에는 알제트(Alzette)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강폭은 좁지만 수량은 많아 강물이 가득하고 그 위에는 세상 편한 오리들이 줄을 지어 이동하고 있다. 그 강의 수면에 비치는 그룬트의 주택들과 하늘의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다.

다리 건너편에는 골목마다 한적한 분위기 속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잘 숨어 있다. 강 바로 앞에는 강을 바라볼 수 있는 강변에 의자를 내 놓은 한 식당이 있고 젊은 아가씨 두 명이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 수다를 떨고 있는 이 아가씨들의 손을 유심히 보니 담배가 들려 있었고 눈길이 마주치자 괜히 겸연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주택가 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한적하게 걸었다. 이곳의 중세시대 주택들을 보면  마치 중세시대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아서, 길을 걸으면 마치 중세시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다.

사람을 빼고 흑백사진을 찍는다면 몇 백 년 전의 모습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길 가의 주택들은 과거의 건물들을 말끔하게 보수하여 사용하고 있다. 집들의 겉모습만으로도 집주인들의 생활 수준이 짐작될 정도로 집들의 상태는 말끔하고 매력적이다. 게다가 주변에는 관광객 한 명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마을의 길가에는 가로등 아래에 기획전시 배너를 걸어놓은 룩셈부르크 자연사박물관(Luxembourg natural history museum)도 있다. 아! 이렇게 운치 있는 주택가 안에 국립 박물관이 포근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 너무나 부럽기만 하다. 박물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이라 박물관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생 장 성당. 바로크 양식의 제단이 화려함을 과시하고 있다.
생 장 성당.바로크 양식의 제단이 화려함을 과시하고 있다. 노시경

박물관을 지나치는데 이 한적한 주택가에 프랑스 관광객 몇 명이 들어왔다. 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나는 그들과 함께 발길 닿는 대로 그룬트의 수도원 옆에 작게 붙어있는 성당 안에 들어가 보았다. 성당 앞에 세워진 그룬트 상세 지도를 보니 이 성당의 이름은 생 장 성당(St. Jean du Grund, St. John Church). 1606년에 성당 바로 옆의 노이뮌스터 수도원(abbaye de neumünster)과 함께  지어진 성당이다.

우리 외에 아무도 없는 성당 안은 어둡고 적막했다. 간결한 아치형 천장 아래에 17세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제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한 프랑스 친구가 나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해 주었다.

"이 성당은 화려한 제단과 함께 검은 마돈나(black Madonna)로 유명한 성당이야. 검은 마돈나를 잘 찾아봐."

블랙 마돈나. 어둠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성모상이다.
블랙 마돈나.어둠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성모상이다.노시경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니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의 한 감실에 검은 마돈나가 진짜 있었다. 유럽에서는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검은 마돈나. 한국에서 하얀 얼굴의 성모상만 보던 나는 이 검은 마돈나, 즉 검은 성모상을 처음으로 보았다. 나는 고정관념을 흔드는 검은 성모상을 보면서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은 성모상을 보는 느낌은 무언가 파격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검은 성모상은 피부색이나 인종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검은 성모상은 우리 내면에 있는 어두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본능적인 소망이 검은 성모상에 나타나 있다. 자신의 어두움을 통과한 성모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검은 마돈나로 나타났을 것이다.

웅장함으로 경건함을 자아내는 큰 성당도 좋지만 이렇게 작은 마을의 조그마한 성당도 참으로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왔던 작은 성당에서 검은 마돈나를 만나면서 이 성당은 이미 내 마음 속에서 내 마음의 룩셈부르크 명소가 되었다.

생 장 성당 밖으로 나와서 보니 성당은 별도의 건물이 아니라 노이뮌스터 수도원의 '날 일(日)'자형 건물 블록에서 북쪽의 한 면 같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다. 수도원의 외곽을 남쪽으로 삥 돌아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노이뮌스터 수도원은 요새 절벽 바로 아래에 시원하고 널찍한 중정(中庭)을 가지고 있다.

노이뮌스터 수도원. 감옥, 군인 막사,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다.
노이뮌스터 수도원.감옥, 군인 막사,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역사적 현장이다.노시경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이 수도원은 여름밤 축제의 콘서트 공연과 함께 다양한 전시회와 음악회 장소로도 많이 이용되는 유명한 문화센터이자 만남의 장소이다. 수도원 외벽에 붙어 있는 수도원 역사 설명도를 보니 프랑스 혁명 이후의 수도원은 경찰서와 함께 국가 감옥으로 이용되었었다.

박물관 블록의 독특한 아치형 전시공간은 바로 이곳이 감옥의 복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를 점령하였던 나폴레옹의 패퇴 후에는 프러시아 군인들의 막사로도 사용되었던 수도원 건물은 나치 점령기에는 룩셈부르크 정치범 수감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노이뮌스터 수도원은 룩셈부르크의 근현대사를 한 몸에 품고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나는 이리저리 미로 같은 길을 찾아 알제트 강을 가로지르는 벤첼(Wenzel) 성벽을 건넜다. 발 아래의 맑은 강물은 요새 절벽과 노이뮌스터 수도원 사이를 잔잔하게 흐른다. 주변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깨끗한 피톤치드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준다. 나는 강변을 따라 내가 걸어온 길의 강 건너편을 다시 걸었다.

멜루지나. 룩셈부르크의 신비로운 신화 속의 주인공이다.
멜루지나.룩셈부르크의 신비로운 신화 속의 주인공이다.노시경

길을 걷다가 다시 나는 나의 발걸음을 멈춘다. 강변의 벤치 위에 와인 빛깔로 빛나는 한 인어 여인이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벤치의 맞은편 자리는 비어 있으니 흡사 나를 벤치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룩셈부르크의 신비로운 신화 속 주인공인 멜루지나(Melusina)였다. 멜루지나가 암벽 투성이인 룩셈부르크 보크(Boke)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부터 룩셈부르크가 생겨났으니 그녀는 룩셈부르크 시민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나는 멜루지나 옆에 잠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룩셈부르크에 최초로 성을 건설한 지그프리드(Siegfried) 백작은 이 알제트 계곡에서 우연히 마주친 멜루지나에게 첫눈에 반한다. 지그프리드 백작이 청혼을 하자 멜루지나는 매주 토요일 그녀가 혼자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고 그녀가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절대로 보면 안 된다는 결혼 조건을 내건다.

그러나 역시 다른 여러 신화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꼬임에 빠진 지그프리드 백작은 열쇠구멍으로 결국 방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욕조 안에 앉아 있던 멜루지나의 하반신은 커다란 물고기 꼬리였다. ​그 순간 멜루지나는 재빠르게 계곡의 깊숙한 곳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이 멜루지나는 언젠가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난다고 한다.

오후 4시 30분인데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해 지는 골목길에 들어섰다. 골목길 노란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자 그룬트는 갑자기 한겨울 유럽의 운치 있는 저녁 마을이 되었다. 강변 주택에서는 나무로 난방을 하는 것 같았다. 물에 젖은 나무가 타는 향긋한 시골 냄새가 골목길에 아련히 퍼져 있다. 강변을 따라 걸으니 귀를 맑게 해주는 아제트 강의 물소리가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골목길의 여인. 여인의 구두소리가 골목길에 울려 퍼지고 있다.
골목길의 여인.여인의 구두소리가 골목길에 울려 퍼지고 있다.노시경

한 여인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가로등 아래서 걷고 있었다. 중세 시대의 돌길 위를 걷는 여인의 구두소리가 '또각또각' 골목길을 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룩셈부르크는 멜루지나일지도 모르는 이 여인의 잔영으로 계속 남을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그룬트의 골목길을 걸었다.
덧붙이는 글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500 여 편이 있습니다.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여행 #룩셈부르크 시티 #그룬트 #알제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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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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