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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수요일
2013년에 "How to Read Literature"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고 하는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책읽는수요일, 2016)을 읽습니다. 영어로 나온 책이름을 곰곰이 헤아린다면 "어떻게 문학을 읽는가"나 "문학을 어떻게 읽는가"라 할 만합니다. 한국말로 나온 책에서는 '어떻게'가 빠졌어요.
다시 말하자면,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이라는 책은 '독자'라는 눈을 넘어서 '비평가'라는 눈으로 문학을 바라보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글을 읽을 적에 '독자 자리'에 얌전히 머물지 말고, '우리 스스로 저마다 다른 비평가 자리'에 서서 바라보자는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연극은 우리에게 어떤 진실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존재의 환영적 속성에 관한 진실입니다.' (97쪽) '많은 사실주의 소설은 독자가 그 인물들과 동일시하기를 요청합니다. 독자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떠할지 느끼리라고 예상합니다.' (145쪽)<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을 쓴 테리 이글턴 님은 '비평가 눈'은 한 갈래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 책에서는 테리 이글턴이라고 하는 분 눈길로 '문학을 읽는 길'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테리 이글턴처럼' 문학을 읽을 수도 있고, '테리 이글턴이 안 하듯이' 문학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학교수처럼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중학생처럼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시골지기처럼 읽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청소부로서 읽을 수 있고, 누군가는 의사나 간호사로서 읽을 수 있어요. 시장으로서 읽을 수 있고, 전업주부로서 읽을 수 있어요.
그러면 가장 나은 눈은 있을까요? 문학을 읽는 가장 훌륭한 길은 있을까요? 문학을 비평하고, 문학을 말하며, 문학을 다루는 가장 놀라운 눈이 따로 있을까요? 문학을 이야기하는 가장 재미나거나 즐거운 길이 참말 따로 꼭 한 가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작가는 사적 경험을 맹목적으로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끌어 내라는 조언을 이따금 받습니다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 너머의 그 어떤 경험도 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가 기록하는 고뇌의 감정은 순전히 허구적일 수도 있지요.' (254, 255쪽)문학책이 아닌 만화책을 읽을 적에도 '한 갈래 눈'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읽기 마련입니다. 나이에 따라서 다르게 읽기 마련이고, 살아온 발자국에 따라서 다르게 읽기 마련이에요. 같은 만화책을 놓고도 가시내하고 사내가 다르게 읽겠지요. 군인과 민간인이 다르게 읽을 테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하고 평화를 안 믿는 사람은 또 다르게 읽을 테지요.
그런데 우리가 문학을 어떻게 읽든 문학은 늘 문학입니다. 내가 이 문학을 썩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이 문학은 언제나 이 문학 그대로예요. 내가 이 문학을 몹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이 문학은 늘 이 문학 그대로입니다. 남들이 어느 문학을 손가락질하거나 깎아내린다고 하더라도 늘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 생각'일 뿐입니다.
문학은 치켜세울 수도 없고 깎아내릴 수도 없습니다. 잘 쓴 글이나 못 쓴 글이 있다기보다 '잘 썼다고 여기는 눈'이 있고, '못 썼다고 여기는 눈'이 있을 뿐이에요. '즐겁게 바라보는 눈'이 있고, '안 즐겁게 바라보는 눈'이 있어요.
그리고, 이처럼 사람들마다 다르게 읽을 수 있기에 문학은 비로소 문학다우리라 느껴요. 문학을 가리켜 '생각과 느낌을 아름답게 빚은 글'이라고 할 적에는 참말 사람들마다 다 다른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슬픔이나 짜증이나 보람이나 사랑을 문학에서 맛볼 수 있기 때문이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