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 전 인천 얼음창고의 환골탈태

"진정한 건축재생이란, 다음 세대에 기회 주는 것"

등록 2016.03.24 13:43수정 2016.03.2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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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빙고'를 검색해보니 서울 홍대 앞에 있는 유명한 카페 '빙고'가 나온다. 홍대 앞의 빙고는 '빙수와 고구마'의 줄임말이다. 이번엔 아카이브 카페 '빙고'를 입력하니 인천 중구 개항로 7-1에 위치한 '빙고(氷庫)'가 나왔다.


한자 뜻대로 1950년대까지 얼음 창고였던 곳이 지난해 카페로 변신했다.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닌,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고 한다. 지난 14일 오후 그곳을 찾았다. 가보니 천장이 높은 건물에 복층으로 1층은 카페, 2층은 건축재생공방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이의중(38) 건축재생공방 대표를 만나 '빙고(氷庫)'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카페 사장은 이 대표의 부인 이규희씨다. 이규희씨가 내준 유기농 당근 수제 케이크와 아메리카노가 맛있었다.

"발전가능성 많은 인천, 아직 늦지 않아"
  
a  아카이브 카페 '빙고'를 운영하는 이규희(왼쪽)씨와 이의중씨.

아카이브 카페 '빙고'를 운영하는 이규희(왼쪽)씨와 이의중씨. ⓒ 김영숙


"토지대장을 보니 1920년대 지어진 건물 같았어요. 1950년대까지 얼음 창고로 쓰였대요. 동네에 살고 계신 분들의 말로는 당시 마포나루터에서 얼음을 갖고 와 (신포)시장에서 사용할 얼음을 보관했다고 하더라고요. 그후에는 인천시교육청에서 소유했나 봐요. 책 등을 넣어둔 창고로 쓰였대요. 그리고 10년 전부터는 빈 공간이었습니다."

빙고는 1920년대 개항장 일대의 얼음 창고로 사용되다가 해방 후 미군부대가 들어오고 신포동 일대에 외국인 클럽들이 생기면서 주류창고로 사용하다 방치됐다. 후미진 골목에 버려진 이곳을 이 대표는 어떻게 발견했을까.

"일본에서 오래된 건물을 재생하는 건축사무실에서 8년간 일했어요. 2012년에 귀국했는데 제가 지향하는 건축세계관과 일치하는 곳이 없어,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어요. 그러다가 국토교통부 산하 국토연구원에서 일을 했습니다."


이 대표는 국토연구원에 있으면서 전국의 오래된 건축물이 남아있는 지역을 다니다 인천을 주목했다. 인천은 다른 도시에 비해 자산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게 오히려 기회라 여겨 인천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 대표는 인천에 연고가 없다. 그러나 귀국 후 2년간 인천 곳곳을 다니며 일본 유학으로 배운 걸 우리나라에서 실현할 장소로 선택했다.


"군산이나 부산, 전주 등은 너무 상업화가 빨리 됐어요. 개발논리가 먹혀 원주민들이 건물을 팔고 나갔어요. 그런데 인천은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아, 뭔가 할 수 있겠다고 본 거죠. 2013년에 처음 인천으로 와서 중구 송학동에 갔어요. 규모와 품격이 있는 건물이 많이 남아있더라고요.

결정적으로 인천에 기대를 품은 건 신흥동의 대저택들이었습니다. 개항지에도 근대 역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물론 덧대서 잘 안 보이지만 살짝만 들추면 그 모습을 다 만날 수 있죠. 근대화·현대화하는 과정에서 도시의 특성을 많이 갖고 있는 것도 매력이에요."

하지만 가치가 있는 옛 건물들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버려진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런 건물에 숨을 불어 넣어주고 싶었단다. 앞으로 할 일이 많겠다는 기대감과 평생을 해도 시간이 모자라겠다는 생각으로 지난해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진정한 재생이란, 다음 세대에 기회 주는 것"
   
a  카페 '빙고'는 기본 원형을 그대로 두고, 지붕과 벽도 최대한 살렸다. 수리하기 전의 벽면 모습.

카페 '빙고'는 기본 원형을 그대로 두고, 지붕과 벽도 최대한 살렸다. 수리하기 전의 벽면 모습. ⓒ 김영숙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고급 주택을 보수하는 일을 하며 회의를 느꼈다. 새로 짓기보다 고쳐 사용하는 리노베이션을 추구했던 그는 큰돈을 들여 기존의 것을 파괴하는 건축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친구들과 고민을 나누던 중,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 우리나라의 목조건축양식과 유사한 게 선택의 이유였다.

"일본에서 오래된 마을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지 배웠어요. 파괴적이지 않고 최소로 고치면서 쓸 수 있게 하는 그들의 방법이 와 닿았죠. 진정한 재생이나 복원은 건물만을 박제화 하는 게 아니라, 계속 사용해 다음 세대로 연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건물을 짓는다면 그 부가가치를 지금 세대에서만 사용할 수 있지만, 오래된 건물은 지금 사용하고 후대들도 다른 용도로 재활용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단다. 건물이 보존돼 다음 세대에도 기회가 가도록 연결해주는 역할, 이 대표는 그걸 지향한다.

"송도에 40층짜리 복합건물을 짓는다면 20년 후에 재개발이나 증축해서 부가가치를 더 높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건물이 20년 후 120년이 돼 새롭게 다른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죠. 그 시대에 맞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어요. 여지를 남겨두자는 거죠. 그런데 개발논리로 파괴하거나 흔적을 없애버리면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음 세대에 기회를 주자'는 표현이 신선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건축가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했다.

"해외에서도 비주류 마이너들이죠. 지금 당장은 사람들한테 인정을 못 받아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해하지 않을까요? 서울에도 활동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이화동 벽화마을이나 창신동, 숭의동에서 도시재생사업을 하는 분들도 있고, 좀 상업적이긴 하지만 북촌 한옥마을도 유명하고요."

빙고, 역사와 문화예술 공간으로 재탄생
   
a  카페 '빙고'는 기본 원형을 그대로 두고, 지붕과 벽도 최대한 살렸다. 현재의 모습이다.

카페 '빙고'는 기본 원형을 그대로 두고, 지붕과 벽도 최대한 살렸다. 현재의 모습이다. ⓒ 김영숙


이 대표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바닥이 깊고 숯과 소금이 많이 깔려있었단다. 지붕은 나무 위에 슬레이트로 덮였고, 벽은 나무와 벽돌에 황토가 덧대어져 있었다.

"기본 원형 그대로예요. 지붕이나 벽도 최대한 살렸죠. 천장을 보시면 나무 색깔이 검은 것과 흰 것이 있는데 검은 건 예전 겁니다. 얼음 창고 입구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너무 낮아 좀 올렸고요. 쇠로 만든 출입구도 옛날 모형 그대로 만들었습니다."

이 대표는 그냥 카페가 아닌 '아카이브 카페'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 지역의 건축물을 전수 조사해 도면과 지형도 등 자료를 축적해 가치를 살려내기 위해서다. 이 작업을 평생 하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왔고, 그 생각으로 아카이브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이 대표가 살고 있는 집은 중구 경동의 고택이다. 올해 2월 <경인일보>의 '인천 고택기행'에 소개된 적이 있다. 1942년 지어진 이 한옥은 그들이 들어오기 전, '소성주'를 만드는 인천 탁주의 5대 회장인 조인흡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고령의 조 회장을 대신해 자녀들이 집을 매각했고, 부동산 업자가 구입했다.

이 대표는 지난해 가을, 빙고를 개업할 무렵 서울에서 내려와 이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언제 재개발돼 쫓겨날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누리면서 살고 싶단다.

지난 16일, 일본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의 건축재생 전문가 그룹인 '쿠라시키재생공방'(倉敷再生工房)에서 활동하는 건축가들이 인천을 방문했다. 나라무라 토오루(楢村徹) 쿠라시키재생공방 대표는 이 대표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날 행사는 이 대표의 '건축재생공방'과 스페이스빔이 공동 주최·주관하고, 스페이스 '잇다'가 협력했다.

오후 2시 빙고에서 출발해 인천아트플랫폼·해안성당교육관·카페 '팟알'·관동갤러리·송학동 재생 일본주택·카페 '싸리재'·배다리 조흥상회·인천양조장 등을 거쳐 스페이스 '잇다'까지 3시간가량 인천의 중·동구에 있는 재생건축물을 답사했다.

답사 후 스페이스 '잇다'에서 나라무라 토오루씨가 일본 쿠라시키에서 30년간 펼쳐온 자신의 도시재생 사례를 들려줬다.

오는 26일에는 '사운드바운드' 행사가 예정돼 있다. 이 행사는 2013년 5월 시작한 축제로, 동인천 개항장 문화지구의 LP카페와 라이브 클럽 등, 다양한 복합 문화공간에서 열렸다. 행사 두 번을 치르면서 기존의 음악축제와 달리 역사적·음악적 유서가 깊은 건물이나 장소를 소개하고 그곳에서 공연해 음악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2014년 10월 2회 행사 이후, 2년 만에 3회 음악축제가 동인천 신포동 일대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축제가 열릴 공간은 개항장 근대건축물을 개조한 인천아트플랫폼, 동인천에서 33년간 활동한 재즈 클럽 버텀라인, LP카페 흐르는 물, 2009년 뮤직펍으로 개업해 밴드 공연 140여회를 주최한 글래스톤베리, 아카이브 카페 빙고다.

라인업은 이정혁·위아더나잇·안녕하신가영·뷰티핸섬·몽키즈·김목인·강아솔·오리엔탈쇼커스와 인천에서 활동하는 미인·램즈·라카차파오 등이 함께한다. 다섯 군데 공연을 모두 관람하려면 2만 원짜리 올 패스(All Pass)권을 구입해야 하고, 한 곳만 관람하면 1만 원이다.

"빙고에서는 다른 곳의 행사가 모두 마무리되는 저녁 9시부터 디제잉 파티를 시작합니다. 공연이 끝난 뮤지션들이 이곳에서 한바탕 노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공간을 이용하고 싶은 분들께는 적극 협조하고 싶어요."
덧붙이는 글 <시사인천>에 실림
#아카이브 카페 #빙고 #이의중 #건축재생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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