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삼인
에드거 앨런 포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삼인, 2016)을 읽으면서 삶이란 어떤 무늬나 결인가 하는 대목을 새삼스레 되짚습니다.
한국말로 옮기기 퍽 까다로웠겠구나 싶은 에드거 앨런 포 님 시를 읽으면서, '시 전집'이라고 하지만 모두 48꼭지에 140쪽 부피인 자그마한 시집을 읽으면서, 달빛이 어리면서 춤추듯이 떨어지는 매화꽃잎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시 한 자락은 달빛을 받으며 떨어지는 꽃잎과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 두 자락은 꽃잎이 가득 떨어진 밭자락을 꽃삽으로 파면서 노는 아이들 손놀림하고 같지 않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시 세 자락은 밥 한 그릇 맛나게 비우고는 새롭게 놀이를 찾아서 마당으로 뛰쳐나가는 아이들 낯빛하고 같지 않을까 하고 되뇌어 봅니다.
아! 무엇이 백일몽 아니겠는가, / 그, 두 눈이 자기 주변 사물을 / 바라보는 그 광선이 / 과거로 돌려져 있는 사람한테? (꿈 (2))소리가 좋아한다 여름밤 한껏 즐기는 것을: / 들어보라구 속삭임, 잿빛 황혼의, / 살그머니 스며들던, 귀, 에이라코에서. (알 아라프)
<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을 읽으면서 '한국말로 옮긴 글' 말고 '영어로 적힌 글'이 무척 궁금합니다. '시 전집'이기도 하고, 시 갯수가 그리 많지 않다면, 또 한국말로 옮기기 무척 까다롭다고 한다면, 영어로도 함께 실어 놓으면 이 까다롭다고 하는 영시를 조금 더 새로우면서 깊게 돌아볼 만할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국말에서는 ':'라든지 '―' 같은 기호를 곳곳에 넣으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쓰지 않거든요. 글로 적힌 말인 시이기도 하기에, 어떠한 숨결과 넋으로 이렇게 온갖 기호를 수없이 넣고 글꼴도 바꾸어 가면서 시를 썼는가 하는 대목을 민낯(영어 원문)으로도 나란히 놓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습니다.
한국말하고 서양말은 말짜임이 달라요. 그래서 서양말로 나온 시를 서양말 짜임새대로 옮기면, 이 영시를 한국사람이 읽다가 숨이 턱 막히기도 합니다. 영어로는 "소리가 좋아한다 + 여름밤 한껏 즐기는 것을"이라든지 "들어보라구 속삭임 + 잿빛 황혼의"처럼 쓸 테지만, 한국말은 이러한 짜임새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말을 영어로 옮기면 어떤 꼴이 될까 하고 생각해 보아야지 싶어요. 한국시를 영시로 옮길 적에 '한국말 짜임새'대로 옮길까요, 아니면 '영어 짜임새'대로 옮길까요? 낱말만 영어로 적으면 되는 한국시일까요, 아니면 낱말도 말투도 말결도 영어대로 적으면 마음으로 느껴서 읽을 수 있는 한국시가 될까요.
꺼졌다―꺼졌다 빛들―꺼졌다 모두! / 그리고, 각각의 떨리는 형태 위로. (정복자 벌레)내가 대답했다: "이건 꿈꾸는 것에 불과해. / 우리 계속하자구 이 떨리는 빛으로! / 우리 멱감자구 이 수정의 빛으로! (울랄루메―발라드 하나)에드거 앨런 포라는 분은 1809년에 태어나 1849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길다고 하면 길 테지만, 짧다고 하면 아스라이 짧다고 할 만한 발자국입니다. 스물일곱 살 나이에 열세 살 사촌 여동생하고 짝을 지어서 살았다 하고, 열세 살 사촌 여동생은 열여덟 살 즈음부터 결핵을 앓아 몸져누웠다 하며, 에드거 앨런 포 님은 퍽 어릴 적부터 술에 기대어 살았다고 합니다.
<에드거 앨런 포 시전집>에 흐르는 이녁 싯말은 모두 이녁 스스로 걸어온 길에서 하나하나 적바림한 이녁 삶이지 싶습니다. 눈물도 담고 웃음도 담고 괴로움도 담고 술내음도 담는구나 싶습니다. 환한 웃음도 담고 시커먼 눈물도 담아요. 죽음보다 괴로운 삶도 담으며, 술방울로 이 삶을 잊으려고 하는 몸부림도 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