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
민음사
<희망 난민>은 이런 시대가 불러 낸 항변 같은 책이다. 책의 저자 1985년생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런 사회에서 '희망 난민'이 되어버린 일본 젊은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희망 난민'은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희망을 이루지도 못한 상태에서 난민처럼 떠도는 가난하고 외로운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일본에서 희망 난민은 1990년대에 들어 급속히 늘어났다. 1973년의 오일 쇼크 이후에도 지속되던 일본의 경제 성장은 1991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품 경제가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진 건 '가족-교육-일'이 조화롭게 맞물려 돌아가던 순환 모델이었다.
'일'의 영역이 무너지자 가족이 와해됐고 교육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 전까지 일본은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고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담론이 이끄는 사회였다. 하지만 후기 근대에 들어선 세계 변화와 맞물려 일본의 사회 구조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더는 좋은 학교가 좋은 직장을 담보하지도, 좋은 직장이 좋은 인생을 보장하지도 못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무너진 일의 영역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청년이었다. 무엇 하나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유동적인 사회에 맞춰 일본 기업은 채용을 축소했고, 일본 정부는 노동 유연화 정책을 내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은 점점 더 노동 시장의 외곽으로 밀려났다. 청년들의 빈곤과 격차 문제가 일본에서 사회 문제로 급격히 떠오르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청년들. 이런 청년들은 '딛고 선 발밑'이 무너져 내린 곳에서 '나'라는 존재가 공중에 붕 떠버린 기분에 사로잡힌다. '존재론적 불안'이 청년들을 엄습했다.
공동체로 몰려드는 젊은이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공동체'라는 새로운 대안이 일본에서 급속도로 고개를 들었다고 말한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안정감과 귀속감을 느끼게 해주는 다양한 공동체로 몰려들어 그 속에서 위안을 얻기 시작했다.
가족, 기업, 국가가 해주지 못하는 일들을 자생적인 공동체들이 대신 도맡아 해 준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공동체의 순기능에 대해 말했다. 공동체 안에서 치유를 거친 청년이라면 다시 시장 경쟁에 도전할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공동체에 대한 의문을 나타낸다. 공동체라는 "마음 편한 안식처"에서 "동료랑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것.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모여든 공동체들은 "분배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도리어 시장 경제를 보완하는 장치로서 기능"할 뿐이었고, 공동체가 오히려 "경제적 불평등을 은폐해 버리는 수단"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며 사회 체제에 대항하지 않는 청년들은 "자본가 측에서 보면 장기판의 유용한 말"이 된다. "낮은 임금에도 불만 없이 일하고, 게다가 노동 환경을 개선하려는 조합 등에 가입할 가능성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 많은 청년들이 공동체로 몰려와 하루치의 즐거움에 만족한다면 "기득권 층에서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이다.
'승인 공동체'는 이렇듯 유동적인 사회에선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에, 여행자는 사막을 건널 수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이 오아시스에 만족해 버리면, 어느 누구도 사막을 녹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그렇다면 저자는 청년들이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걸까.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더라도 우선은 공동체로 몰려오지 말고 혼자서 어떻게든 애를 써보라는 걸까. 사회 변혁에 헌신하고 꿈, 희망을 향해 달려가면서?
젊은이여, 희망을 단념하라?아니다. 저자는 책의 초반부터 말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단념하라 말하기 위해서라고. 저자는 젊은이들에게 꿈도, 희망도 단념하고 그저 공동체라는 오아시스 안에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라고 진심으로 말한다. 돈은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이제 그만 애쓰고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것이다.
'경력 사다리조차 충분히 갖추지 못한 사회에서 꿈을 좇으려면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 그러한 의미에서 단념할 수 있었던 사람은 행복했던 셈이다. '세계 평화'를 목표로 일본에서 끊임없이 시위를 전개하거나 사회 변혁을 위해 계속 투쟁하거나 '하면 된다.'라고 자기 계발을 독려받는 것보다, 사이좋은 친구들과 바비큐 파티를 함께하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매일 밤 계속 나누는 편이 훨씬 행복하지 않을까?' - 본문 중에서책에서 내내 공동체의 역기능을 말해놓고, 정말 뜬금없는 결론이다. 저자도 이런 반응을 예상했는지, 이렇게 묻는다.
'필자의 주장이 심하다고 생각하는가?' - 본문 중에서이어 저자는 심한 건 오히려 사회라고 말한다. 이런 사회를 만들어 놓고 젊은이들한테만 '노오력' 하라는 사회이지 않냐면서.
'그러나 괘씸한 쪽은 힌트도, 튜터리얼도 충분히 주지 않고 공정한 업그레이드 구조마저 갖추지 않은 채 어쨌든 열심히 노력하라 혹은 꿈을 포기하지 마라라고 시끄럽게 부르짖는 사회가 아닐까? 굳이 '쓰레기 게임'을 완료하지 않아도 된다. 끝판까지 가는 걸 단념하고 친구들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면, 이런 사회조차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다.' - '본문' 중에서저자는 이 책을 25살 때 썼다. 이 책을 쓴 후 1년 후 재작년에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을 이어 펴냈다. 이 두 책을 읽으며 유념해야 할 건 저자가 바로 이 두 책의 주인공인 '젊은이'이라는 사실이다. 학자이기도 하고, 젊은이이기도 한 저자는 책을 통해 사회를 향해, 어른들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린 이런 상황에 놓여있다고. 이렇듯 절망적인 사회에서, 아무도 우릴 도와주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힘으로 행복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단념하지 않아도 된다책의 서문엔 일본 내각부가 2013년에 13세부터 29세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일본과 여러 외국 젊은이가 지닌 의식 조사> 결과가 실려 있다. 조사에서 일본 젊은이는 61%가 희망이 있다고 대답했고, 한국의 경우는 86%가 희망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 책을 읽지 않고 이 조사 결과만 봤다면 난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희망이 없는 것보단, 희망이 있는 게 좋은 거니까.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희망'만 있는 우리 사회의 수많은 '희망 난민'들을 생각하게 된다. 절망스런 현실과 미래의 뿌연 희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수많은 한국 청년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청년들에게, 나에게 희망을 단념하라고 말하기가 두렵다. '희망 없이 행복할 방법'을 내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젊은이를 단념시키라는, 스스로도 말하듯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주장을 폈다. 그리고 이 주장 후에, 책을 끝마치기까지 총 6문단을 이용해 '단념하기 싫은 사람은 단념하지 말라'고도 말했다. 이유는 "아무리 '단념하라'라는 말을 듣더라도 뭔가를 하려는 사람은 그 일을 하고" 말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책은 막스베버의 아래의 말을 인용하고 끝을 맺는다.
'지도자나 영웅이 아니라도,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어떠한 좌절에도 꺽이지 않는 단단한 의지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가능한 걸 관철할 수 없다. 자기가 세상에 바치려는 것에 비해 현실이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어리석고 비속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은 인간. 어떠한 사태에 직면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잘라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지닌 인간. 그러한 인간만이 정치를 '천직'으로 가질 수 있다.'단념하고 말고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왠지 저자 또한 단념하지 않는 사람같아 보인다.
20대 총선 결과가 나왔다. 20, 30대 투표율이 19대 총선때보다 10포인트 이상 올랐다고 한다. 투표를 한 사람들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건 이렇듯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오늘 하루를 살아나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희망난민 - 꿈을 이룰 수 없는 시대에 꿈을 강요당하는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혼다 유키 해설, 이언숙 옮김,
민음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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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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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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