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거스미스>(2006년판)의 표지.
열린책들
영화화된 <아가씨>가 반전이 숨어 있는 플롯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으려고 노력한 것과는 달리, 원작 소설은 두 주인공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으로 진화하며 단단히 맺어지게 되는 과정에 집중합니다.
어머니가 사형수라고만 알고 있는 수전은 빈민가에서 양어머니 손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사기꾼 젠틀먼의 제안으로 부잣집 상속녀 모드의 하녀로 들어가게 됩니다. 모드와 결혼한 다음 정신병원에 그녀를 처박고 재산을 가로채려는 젠틀먼의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수전은 모드에게 반해 버립니다. 그런데 모드에게도 계획이 있습니다. 수전을 자기 대신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자유의 몸이 되려는 것이죠. 하지만 모드 역시 수전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영화와 가장 다른 부분은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설정입니다. 책의 설정이 무척 상투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만, 막장 드라마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의 반전 효과만을 노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드가 수전에 대해 가졌던 근거없는 우월감을 내려 놓고,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로 인해 수전과 모드의 사랑은 훨씬 굳건해지지요.
영화는 각색 과정에서 진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련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그 점이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인데도 말이죠.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첫눈에 반한 다음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물들의 감정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지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사람들이 영화에 실망을 표시하는 주된 이유는 아마도 이런 점 때문일 겁니다.
<핑거스미스>는 작가가 전작 <벨벳 애무하기>나 <끌림> 같은 작품을 쓰면서 갈고 닦지 않았더라면 나올 수 없었을 작품입니다. <벨벳 애무하기>의 피카레스크식 구성과 실감나는 성애 묘사, 그리고 <끌림>의 감옥 생활 묘사와 1인칭 시점을 활용한 반전의 트릭 같은 것들을 보다 능숙한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라 워터스의 '빅토리아 시대 3부작'은 먼 나라 영국의 근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지만, 21세기의 한국 사회에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일체의 우월감이나 열등 의식 없이 똑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연대할 때 의미있는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작가의 주제 의식은, 여성과 소수자의 사회적 지위가 여전히 열악한 오늘의 한국 사회가 들어야 할 꼭 필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연대'는 사회적으로 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철저한 자기 반성이 선행된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겠지만요.
벨벳 애무하기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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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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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와 김태리, 영화 <아가씨>가 간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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