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현의 아들 웰링턴 정이 의사가 되기 위해 체코로 떠나기 전 촬영한 가족 사진. ① 현순목사, ② 앨리스 현, ③ 웰링턴 정
돌베개 제공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지난 1995년 기사화한
내용에 따르면, 이들의 망명 신청에 대하여 체코 정부는 망명 동기가 모호하고 북한이 부모의 고향이라 밝혔지만 그것이 거짓임이 판명되자 그들을 의심하였다. 북한 내무성 안전국도 결국 이들의 망명 신청을 거부하였다.
이때부터 이사민·앨리스 현과 박헌영이 관련되기 시작한다고 서울신문은 보도했다. 당시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이 내무성의 결정을 뒤집고 그들에게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었다는 것. 또 그들이 입국했을 때 직접 환영 행사까지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 후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으로 일했으며, 앨리스 현은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하는 등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서울신문은 '내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북한 이들이 짧은 기간에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들의 입국 과정부터 의심을 갖고 있었던 내무성 안전국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코로 가던 도중 체포되고 만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이들의 소지품을 조사한 결과 여러 국가기밀자료가 나온 것.
이들의 '북한망명 이후 체포까지'의 이런 이야기에 대하여 정병준 교수는 반론을 제기한다(정병준, '현앨리스 이야기', 역사비평 2012년 여름호). 그에 의하면 앨리스 현과 이사민은 북에서 박헌영을 숙청하기 위한 죄목으로 '미제스파이'임을 꾸미기 위하여 이들의 이력이 이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앨리스 현과 이사민이 박헌영 재판에 증인으로 등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생사가 명확히 공개되지 않았음을 든다(앨리스 현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 남쪽에서는 누구도 모르는 상태다). 뿐만 아니라 1952년 초 주일미군 CIC가 체포한 북한공작원 김규호의 증언에 의하면, 이사민은 1952년까지 조국전선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진보적 재미한인 즉,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으로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아들 역시 1963년 체코에서 자살함으로써 모자의 비극적인삶은 종결되고 말았다. 이처럼 비극적으로 사라져 버린 그녀의 삶, 명확히 밝혀지지 못한 그녀의 죽음 그리고 하나뿐인 자식조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비극적인 현실은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세계 전쟁이 끝나고도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현실이 그들의 삶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해방 전후의 여인, 앨리스 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참으로 슬펐다. 그녀가 과연 '미제스파이'였는지 아닌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전문연구자들의 몫이며, 훗날 통일이 되어야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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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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