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독도폭격사건에 대한 보도(1948년 6월 19일자 경향신문)
경향신문
이쾌대가 <군상Ⅳ>를 그린 시기는 1948년이다. 즉 전쟁도 나기 전이다. 그런데 그해 6월 독도는 미 공군 93폭격대대의 폭격기 B29 10대에 의해 폭격 당하여 수십 척 선박이 침몰했고, 최소 30~100여 명의 어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독도는 미국이 폭격연습지로 지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폭격연습이 아니었다. 어민들 증언에 의하면 저공비행하며 육안으로 식별가능한 거리에서 기총소사까지 하였던 것이다(관련기사 :
1948년 미공군 폭격연습 표적 "어민 150여명 무고한 희생").
이 독도폭격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있다. 독도는 '기본적으로는 한일관계'의 문제이지만 '내용적으로는 한미일관계'의 문제이다. 따라서 독도를 한일관계로만 바라본다면 이 문제의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일본이 연합국점령 하에 있던 1947년 9월 16일 미국은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며 그 사실을 일본정부에 알려주었고, 연습 이전에 주민들에게 통보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폭격연습 때도 통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도는 일본이 연합국의 점령관리 하에 있던 1951년 7월에 또 다시 폭격연습장으로 지정되는데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논리구조는 간단히 말해 '독도는 일본 국내시설 및 구역이므로 훈련구역에서 해제되면 당연히 일본으로 반환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이 자기 나라도 아닌 오키나와를 미군기지로 조차시켜 놓아 훗날 자신의 영토로 환원시킨 사건을 기억해야 한다. 일본은 독도도 같은 방식으로 돌려받을 계획이었다.
미국무부는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1~5차까지의 초안에는 독도가 한국령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로비로 미국은 독도를 일본 영토로 포함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에 뉴질랜드와 영국이 미국의 수정에 반대하여 결국 독도는 일본과 한국 어느 영토조항에도 넣지 않고 아예 빼버린 것이다. 미국은 분명히 '독도는 일본령'이라고 일본을 지지했으며, 결코 '독도는 한국령'이라고 말한 바가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관련기사 :
美, 독도문제 책임지고 '독도=한국영토' 입장 밝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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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2015), 『서촌을 걷는다』(2018) 등 서울역사에 관한 저술 및 서울관련 기사들을 《한겨레신문》에 약 2년간 연재하였다. 한편 남북의 자유왕래를 꿈꾸며 서울 뿐만 아니라 평양에 관하여서도 연구 중이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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