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책 <깡통 소년>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글/ 프란츠 비트캄프 그림
아이세움
다음으로 만나볼 책은 SF영화처럼 흥미진진한 <깡통 소년>이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들어 있는 커다란 깡통이 집으로 배달된다면, 이 한 여름의 무더위는 오싹한 소름으로 바뀔 듯하다. 깡통을 열자 어린 소년이 대뜸 "엄마"라고 부른다면, 현재의 시공간을 의심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
바톨로티 부인은 어리둥절했다. 깡통 속엔 아버지가 콘라트 아우구스트 바톨로티라고 적혀 있는 출생증명서가 있었다. 남편은 말도 없이 집을 나간 지 벌써 오래 전이다. 엄마?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부인에게 그 말은 외계어처럼 들린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인스턴트 아이'가 종알거리는 생소한 단어 앞에서 부인은 어쩔 줄을 모른다.
깡통 소년의 이름은 콘라트 바톨로티. 깡통 속엔 공장의 교육과정을 우수하게 수료한 성적표도 있었다. 콘라트는 예의 바르며 어른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아이 프로그램에 맞게 훈련된 아이다. 어떤 행동을 해도 되는지 먼저 물어보고, 집안일을 돕겠다고 나서며, 학교 가기 전에 예습은 필수다. 자기 전이라면 사탕의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다. 콘라트는 완제품반에서 금지된 사항을 어기면,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까지 배웠다.
난생 처음 엄마가 된 바톨로티 부인은 카펫 가내수공업자다. 부인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즐긴다. 남들과 비슷한 옷차림과 평범한 화장은 질색이다. 그래서 부인은 어디 가나 눈에 띈다. 바톨로티 부인의 남자 친구인 에곤은 콘라트의 아버지를 자처하고 나선다. 똑똑한 아이를 아들로 삼을 기적 같은 일을 놓쳐버릴 사람이 어디 있겠냐면서.
이렇게 해서 콘라트의 새로운 가정이 꾸려진 셈이다. 자상하고 얌전한 행동과는 거리가 먼 엄마 바톨로티 부인과 공부에 대한 기대가 남다른 아빠 에곤, 그리고 완제품 훈련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아들 콘라트까지. 어쩌면 콘라트네 가족은 가까운 미래에 신인류가 만들어낼 가정의 한 유형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콘라트의 학교생활은 어떨까. 지켜야할 것은 반드시 지키는 콘라트에게 아이들 세상은 오류가 넘쳐나는 이상한 나라다. 의문의 물음표가 잔뜩 걸려 있는 해독 불가능한 신세계다. 아이들은 왜 서로를 골려먹는지, 선생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지, 시험공부는 미리 준비하지 않는지, 이해 불가능하다.
그런 콘라트를 향해 바톨로티 부인은 말한다. 애는 애다운 말투를 쓰고, 애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콘라트는 애다운 게 뭔지 공장에서 배운 적이 없었다. 지켜야할 규칙과 금기시된 행동들만 익혔다. 부인은 말한다.
"너 스스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봐!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게 뭔지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122쪽)
콘라트의 인식세계는 꼭 공장에서 찍어놓은 통조림 같다. 혹시 내가 바라던 아이 역시 깡통 소년을 닮은 것은 아닐까. 예절 바른 아이, 착한 아이, 공부 잘 하는 아이는 아이들에게 투영되는 이 시대의 공통적인 이상향이다. 모든 부모의 열망을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 깡통 소년이건만, 무슨 조화인지, 전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특별한 상황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다. 콘라트네 가족에게도 뜻밖의 위기가 찾아온다. 깡통 소년을 만든 회사 직원이 직접 바톨로티 부인을 방문한다. 잘못된 배달 사고였다는 정중한 사과와 함께 콘라트를 즉시 돌려달라는 것이다.
이제 막 가족의 정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허무하게 헤어질 수는 없다. 특별한 상황에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가족과의 생이별을 막기 위해, 콘라트가 해낼 고난이도의 특별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콘라트는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는 통쾌한 웃음을, 어른들에게는 발그레한 홍조를 선사해주는 책. 아이들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깡통 소년'이 아니다. 인간은 저마다 다른 무늬로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합리적인 생산 라인으로 짜 맞춰 놓은 깡통 제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 마지막 장에는 "하느님 맙소사!"를 외치는 바톨로티 부인과 에곤이 등장한다. 같은 말 다른 뜻을 표현하는 그 속사정을 꼭 확인해보시기를. 청량한 웃음이 무더위의 갈증을 시원하게 날려보낼 것이다. 동화가 그려내는 상상은 어제와는 조금 다른 세상을 보여줄는지도 모른다.
우리 누나
오카 슈조 지음, 카미야 신 그림, 김난주 옮김,
웅진주니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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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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