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국의 <순교자>
문학동네
김은국의 대표작 <순교자>는 1964년 미국에서 발간 당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을 정도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고, '한국계' 미국작가(미국명 Richard E. Kim)로는 처음으로 1967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영예를 작가에게 안겨 준 소설이다.
<순교자>는 제목과 같이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무신론자의 눈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살해당한 12명의 목사와 살아남은 2명의 목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와 그 해석의 왜곡 문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소설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 대위는 전쟁이 끝나면 대학으로 돌아갈 것을 꿈꾸는 정보장교로 정의감이 투철하다. 이 대위가 처음 평양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는 부분은 얼마 전 700만 이상의 관객을 끌어 모은 하정우 주연 영화 <터널>에서 구조된 후의 한 장면을 닮았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언론의 모습을 김은국은 반백년 전에 고발한 셈이다.
"한국전쟁 국군의 북진 초기에 경험했던 어떤 분노. 평양 남쪽 얼마 떨어진 한 산기슭 동굴에 공산주의자들이 정치범 수백 명을 동굴 속에 밀어 넣고 기관총 사격을 한 다음 폭약을 터트려 동굴 입구를 막아버린 사건. 나는 카메라 뒤의 무관심하고 차가운 눈초리들로부터 한 인간이 지닌 고난의 말없는 위엄을 내 온몸으로 지켜주기라도 할 듯이, 남자의 몸 위로 상체를 구부리고 연옥과도 같은 그의 납빛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여보, 대위" 하고 누군가가 고함을 내질렀다. "비켜주시오. 사진 좀 찍게."......"대위, 사진 좀 찍게 비켜주시오." 하는 소리들이 기분 나쁘게 뒤섞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밀쳐내는 것 같았고 나는 분노로 앞이 캄캄해지면서 한 사병이 들고 있던 삽을 낚아채어 카메라들을, 차가운 눈초리들을, 그리고 파리 떼, 그 끔찍한 파리 떼들을 쫓고 때려 부수고 갈기기 시작했다......."
전쟁 가운데 인간이 한낱 체제 선전의 도구로 전락하는 현실을 보며 호기 좋게 분노를 표출할 줄 알았던 이 대위는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목사 처형을 '순교'로 선전하려는 자신의 상관, 장 대령과 대립한다.
장 대령은 12명의 목사들이 어떠한 고백을 하며 최후를 맞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이 대위는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이야말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며 실체적 진실에 다가서려고 한다.
둘 사이의 이런 갈등은 상명하복이 엄연한 전시 한국 군대에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하지만 이 대위가 역사를 전공한 먹물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둘의 갈등이야말로 현실적이기도 하다.
12명의 목사와 함께 잡혀갔지만 살아남은 신 목사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이 대위를 압박하는 장 대령은 전형적인 체제 순응형 군인이다. 그에게 '순교'는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며 남측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좋은 도구일 뿐이다.
"순교자들의 영광에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있을 수 없다는 걸 자네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들은 훌륭했고 성자와도 같았어. 왜? 그들은 '순교자들'이고 빨갱이들 손에 희생됐으니까. 간단하지 않은가. 그럼 나머지 생존자들은? 그들 역시 훌륭했고 거룩했지. 왜? 그들 역시 빨갱이들에게 잡혀가서 투옥됐던 사람들이니까. 그 사람들도 놈들에게 고문을 당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기독교 목사들이니까. 그래도 모르겠어? 모든 건 바로 이렇게 돼야 하는 거야. 죽은 자나 생존자나 모두 칭송받을 자격이 있어. 그들은 다 같이 훌륭하고 성자다워야 하는 거야. 알겠나?"
이처럼 장 대령에게는 진실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순교자들을 영웅적이고 성스럽게 포장해야 하고, 살아남은 자는 영광을 증언하는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그게 정당한 평가라고 믿는 그에게 신 목사는 최적의 도구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부끄럽고 허약한 모습을 보이고, 심지어 배반한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 장 대령에 대해 반기를 드는 사람은 이 대위 말고도 장 대령의 친구이기도 한 고 군목이 있다. 그는 순교자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것이지 인간의 일시적 필요에 봉사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대가 탈영병 백 명을 데려다 백 명의 영웅으로 둔갑시켰다면 좋아. 얼마든지 그래 보게. 그러나 정말이지 그대가 함부로 신앙의 순교자를 날조할 수는 없는 거야. 그거야말로 최대의 경멸을 받아 마땅할 신성 모독이지."
고백 없는 순교자와 이를 지키려는 자, 그 이유
신에 대한 고백 없이 죽은 자들을 순교자로 만들고, 살아남은 신 목사를 영웅으로 만들고자 했던 장 대령의 의도는 뜻밖에도 신 목사에 의해 거부된다. 사람들은 핍박받는 동안 암담한 영혼 속에 질질 끓던 모든 것들, 모든 슬픔을 쏟아내며 신 목사를 '유다'라 비난하지만, 그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양 떼가 한순간 울부짖는 폭도로 돌변하여 자신을 비난하는데도 몸을 내어놓는 모습을 보며 장 대령은 "그 사람과 내가 서로 정당한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난 미처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장 대령이 말한 공통의 이해관계는 신 목사에겐 '그가 보호해야 할 교회와 교회의 명예가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에겐 자신이 지켜야 할 국가와 그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 목사는 교회와 교회의 명예를 보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변호하고자 한 것이었다. 인간 앞에 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열심히 전파하는 목사가 되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변호하는 목사로 절망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던 것이다.
"날 좀 도와주시오. 불쌍한 내 교인들,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에 시달리는 이들을 내가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난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중략- 우린 절망과 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우린 그 절망을 때려 부수어 그것이 인간의 삶을 타락시키고 인간을 단순한 겁쟁이로 쪼그라뜨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런 신 목사의 절규에 이 대위는 "당신의 신은 그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알고 있는가? 아무 관심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당신은 사람들을 속이는가?"라고 물으며 스스로도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이 대위는 "신을 가진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기도 소리를 뒤에 남기고 나는 문을 닫았다"는 말로 자신은 사건의 본질에 있어서 국외자임을 인정하며 물러선다.
인간의 고통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고통이 의미 없고 인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면 인간은 그 난국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순교자>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해답을 찾고자 파고든다.
<순교자>가 노벨 문학상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런 질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 질문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과 고통당하는 인간에 대한 동정 및 이를 헤쳐 나오는 불굴의 노력을 그리려고 했다. 역사는 그러한 질문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해 왔고, 발전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순교자>는 주제의식과 접근 방법에 있어서 엔도 슈사쿠의 1966년작 <침묵>과 현기영이 1978년 발표한 <순이삼촌>을 떠올리게 한다. <침묵>은 '순교' 혹은 '배교'를 배경으로 '신' 없는 세계의 고통과 의미를 고찰하고, <순이삼촌>은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 역시 '신 없는 세계의 고통'의 의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닮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소설들은 "문학은 숨겨진 역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다. 그 중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순교자>다.
시대의 아픔인 4·3을 외면하지 않았던 현기영은 "공동체의 경험에 대한 관심을 시대착오, 혹은 야만이라고 매도하는 따위의 언어도단은 버리자"며 "세계문학은 개별 세계에다 우리 것을 추가해야지, 세계를 너무 흉내 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비록 김은국이 영어로 작품을 발표했지만, <순교자>는 밖으로는 세계 보편성을 지향하며, 안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깊이 천착한 소설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순교자>는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을 때, 한반도 공동체의 남다른 경험을 소재로 세계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품을 썼다는데 의미가 있다. 10월 중 발표될 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에 촉각을 세우는 이때, 우리에게 <순교자>를 뛰어넘는 위대한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순교자 (반양장)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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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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