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핸드 타임> 표지
이야기가있는집
소련이 붕괴된 1991년부터 2012년도까지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세컨드 핸드 타임>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작가는 그 인터뷰를 '길거리에서 나눈 잡담과 부엌에서 나눈 대화'라고 했다. 하지만 그 대화는 '자유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진지한 것이었다.
그 결과 작가는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직전 알렉산드르 그린이 "왠지 미래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그만둔 것 같다"는 글을 인용하며, "100년이 지난 오늘, 미래는 또다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바야흐로 세컨드핸드의 시대가 도래 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럼,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예단하게 했고, '세컨드핸드', 중고물품처럼 옛 시대를 답습하고 있다고 보게 했을까?
부제로 달린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는 그 이유를 가늠하게 한다. 소련은 태초부터 살아온 아담, 사람을 개조시키겠다는 포부로 독특한 인간 유형인 사회주의적 인간 즉,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창조했다.
그들에게 조국은 10월이고, 레닌이고 사회주의였다. 혁명을 사랑한 그들에게 당은 가장 소중한 것이었고, 당원증은 성경책과도 같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 지상 천국을 건설하려 했지만 그건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에는 인간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만들기 위한 광기의 스탈린 시대가 지나며 사회주의는 인심을 잃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스탈린을 심판하지 않았다. 만일 스탈린을 심판하려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 친지, 지인들을 심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수용소나 전쟁은 일상이었다. 당시 소련 학교에서는 인간 자체는 선한 존재다. 아름다운 존재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세대의 이야기는 폭력에 대한 것, 죽음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들은 죽음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때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죽는 게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을 때니까······.물이 없는 바다가 없듯, 피 없는 전쟁도 없어요. 생명을 주신 건 하느님인데, 전쟁 때는 아무나 다 그 생명을 빼앗아 버려요."
소련의 몰락은 갑자기 찾아왔다. 잘살고 싶어 하고, 청바지와 비디오, 자동차를 살 수 있길 바라고, 화려한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는 인민의 요구에 고르바초프가 응답한 것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공산주의는 처참하게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은 또 다른 사람들을 필요로 했을 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약한 자들의 눈을 구둣발로 후려치는 사람들이요! 바닥에 있던 것들이 위로 올라왔어요. 뭐 어쨌든 또 하나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혁명의 목적은 숭고한 무언가가 아니었어요. 번듯한 별장과 자동차를 갖기 위한 혁명이었어요. 그건 너무 보잘 것 없지 않아요? 길거리는 트레이닝복의 '물결'로 가득했어요. 늑대 같은 놈들! 그들이 모두를 짓밟았어요."
자본주의의 폐해는 마당에 모인 남자들의 안주거리로 처음에는 고르바초프를 나중에는 옐친을 올리게 했다. 단지 '보드카가 비싸졌다'는 이유로. 형언할 수 없는 거친 격정에 사로잡혀 체재를 욕하는 시대의 공기에는 돈 냄새가 배어 있다. 큰돈의 냄새. 그리고 절대적인 자유가 있었다. 그 가운데 모두가 '쩐(돈)'을 만들고 싶어 했고, '쩐'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은 만들 줄 아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그런 세태를 보며 충격을 받은 이들은 너무 오래 살았음을 자책한다. 신념을 간직한 채, 가슴에 혁명을 품고 죽을 수 있었던 친구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의 시대는 그들의 삶보다 훨씬 전에 그렇게 갑자기 끝나 버렸다.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들, 시대가 그랬다고만...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자본주의라는 화려한 포장에 매수되어 청바지와 슈퍼마켓을 위해 달렸던 거였다. 그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햄이 행복과 영광의 길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위대한 민족이었던 시절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결국 세컨드핸드 타임이 시작된 셈이다. 그때가 되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 시작한다. 예전 사람들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고. 그들은 그 나라를 떠나고 싶어 하고, 안 되면 아이들만이라도 그 나라에서 밀어내고 싶어 한다.
"그때 그 사람들, 그 사람들은 '우리'였어요. 난 그 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나온 사람이에요. 난 지금의 이 나라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에요."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사상은 피를 부르기 마련이다'라며 소련 시절을 떠올린다. 자신들의 대뇌피질에는 제국주의, 공산주의가 각인되어 있고, 영웅적인 무언가가 자신들에게 차라리 맞는다고 소리 지른다. 책 더미에서 자란 전형적인 공부벌레들조차 붉은 혁명이 다시 시작되기를 꿈꾼다.
역자는 '책을 번역하면 할수록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에 등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악인이 반드시 뿔 달린 악마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인간'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이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인간'을 조명하고 있다. 공산주의 속에 사는 인간을, 민주주의 속에 사는 인간을, 전쟁터에서의 인간을. 평화로운 삶 속에서의 인간을,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으로 '호모 소비에티쿠스'를 내세우지만, 초점은 '소비에티쿠스'가 아닌 '호모'에 있다고 본다."
이 책에는 참으로 '악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가져온 삶 역시 고달프고, 소련과 스탈린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나고, 고르바초프가 부정적인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는 과정을 경험한 이들의 논리는 한결같다.
시대와 제도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책임을 회피한다. 그래서 알렉시예비치는 '평생 선과 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버린 자신이 무섭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책임지지 않는 인간들에게 그는 '그건 환경이 아니라 각자가 선택한 길이었다'고 말한다.
역자는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리며 부나 가난 때문에 바뀌지 않는 사람,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이뤄내려면 '정상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다"고 후기를 마무리 지었다.
악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논리는 이 땅이라고 다를 바 없다. 민족반역자들이 그랬고, 군사독재정권에 부역한 이들이 그랬다. 그러나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때가 어느 때였는지..."
세컨드핸드 타임 - 호모 소비에티쿠스의 최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하은 옮김,
이야기가있는집, 2016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