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 교과서에 수록되어야"

[영천성 수복전투 ①] 치밀한 준비와 효과적 화공으로 임란 전체에서도 뜻깊은 승전 이뤘다

등록 2016.11.01 10:28수정 2016.11.01 11:25
0
원고료로 응원
a  창대서원 강당은 가파른 강변 절벽 끝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건물 정면 전체 사진을 찍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대임 의병장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수복 전투 때 이곳 창대서원과 조양각 방향의 영천읍성 남쪽을 공격했는데,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왜적의 대장 법화가 스스로 몸을 던져 절벽 아래로 떨어져 대패를 자인하는 것을 보고 적장의 목을 베어 승리를 자축했다.

창대서원 강당은 가파른 강변 절벽 끝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건물 정면 전체 사진을 찍는 것이 불가능하다. 정대임 의병장은 1592년 7월 27일 영천성 수복 전투 때 이곳 창대서원과 조양각 방향의 영천읍성 남쪽을 공격했는데,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왜적의 대장 법화가 스스로 몸을 던져 절벽 아래로 떨어져 대패를 자인하는 것을 보고 적장의 목을 베어 승리를 자축했다. ⓒ 정만진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8월 1일자 중 한 기사는 '권응수가 영천의 적을 격파하고 성을 회복했다'로 시작된다. 이는 권응수가 영천성 전투의 총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권응수가 총대장 직책을 수행하게 된 것은 김성일의 명령에 따른 일이었다. 영천성이 왜적의 손아귀에 들어간 이후 의병장 정세아, 조희익, 곽회근 등 영천의 유지 60여 명은 멀리 진주에 있는 초유사 김성일에게 서신을 보내어 경상좌도 일원의 정세를 보고한 뒤, '수령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까닭에 의병군이 누구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할지 알 수가 없다'면서 '공(김성일)의 지휘를 받겠노라' 하였다.


수령들이 도망가고 없으니 의병들은 누구의 명령 받으리오?

김성일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초유(招諭, 관군과 의병을 독려)의 임무를 맡고 있는 내가 어찌 여러분의 충의에 감동하지 않겠소!" 하면서, 권응수가 경상좌수영 우후 출신으로 무장인 점을 감안하여 의병대장의 역할을 맡도록 조치했다.

이때, 이미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여 자신감을 얻은 정세아, 정대임 등 영천 의병장들은 영천성 수복을 결의, 신녕의 권응수 등에게 지원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경주, 하양, 자인, 대구, 의성, 의흥, 흥해, 영일의 의병 부대에도 참전을 요청했었다. (영천성 수복 준비 관련 기사는 <영천 수복 위해 의병들은 이렇게 준비했다> 참조>

a  의병장 정대임을 기려 세워진 창대서원 강당에서 내려다 보는 영천 남천의 모습. 영천성 일대가 남천을 천혜의 해자로 활용하여 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의병장 정대임을 기려 세워진 창대서원 강당에서 내려다 보는 영천 남천의 모습. 영천성 일대가 남천을 천혜의 해자로 활용하여 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 정만진


영천 의병들은 7월 23일부터 추평(楸坪, 주남들판)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화공(火攻) 때 쓸 마른 풀과 나무를 준비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데 사용할 사다리도 만들었다. 의병들이 사다리를 부지런히 만든 까닭에 대해서는 <선조수정실록> 1591년(선조 24) 7월 1일자 기사가 증언을 해준다. 

조선 조정은 '왜적은 수전에는 강하지만(倭長於水戰) 육지에 오르면 불리해지므로(若登陸則便不利) 우리는 육지 방어에 전념해야 한다(專事陸地防守)' 식으로, 사실과 정반대되는 터무니없는 판단을 하고도 모자라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데만 신경을 써 험한 곳이 아니라 평지에 성을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3장(丈, 사람 키 정도 길이)에 불과했고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으로,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을 일으켰다.'


엉성하게 쌓은 왜란 대비 축성, 탈환전 때는 오히려 도움

당연히 '식자들은 (그런 성으로는) 결코 적을 방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識者知其決不能守禦).' 즉, 성 안에 일본군이 있고 우리가 거꾸로 공격을 하게 된 상황에서는 형편없이 축성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고, 사다리만으로도 성곽을 충분히 타넘을 수 있었으므로 창의의용군은 그것을 제작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것이다.


a  영천 남천을 하늘이 내려준 해자로 삼아 축성되었던 영천읍성 일대의 풍경. 사진 가운데에 있는 정자가 조양각으로, 이 부근이 남문 자리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영천 남천을 하늘이 내려준 해자로 삼아 축성되었던 영천읍성 일대의 풍경. 사진 가운데에 있는 정자가 조양각으로, 이 부근이 남문 자리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 정만진


24일에는 곳곳의 의병들이 도착하여 인원이 3500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대장 권응수, 전봉장(前鋒將, 선봉장) 홍천뢰, 좌총(左摠) 신해, 우총(右摠) 최문병, 중총(中摠) 정대임, 별장(別將) 김윤국, 찬획종사(贊畫從事, 작전참모) 정세아와 정담 등으로 지도부를 구성했다. 아군은 들판에 깃발을 꽂아 휘날렸다. 군대의 이름은 창의의용군(倡義義勇軍)이라 정했다. 25일에도 경주의 권사악, 손시, 최진립 등이 정예병 100여 명을 이끌고 당도했다.

영천성 수복전을 위해 운집한 4천여 창의의용군은 영천 출신 의병만이 아니었다. 홍천뢰가 (군위) 의흥 의병장, 신해와 최문병이 (경산) 하양 및 자인 의병장이기도 했지만, 아군에는 영천과 신령의 곽회근, 권응신, 권응심, 권응전, 권응평, 박응기, 신준룡, 이온수, 전삼익, 전삼달, 정응거, 정천리, 조성, 조희익, 최인제 등만 모인 것이 아니었다.

여러 지역 의병들과 관군까지 합세한 모범, 영천성 수복전

경주의 권복시, 권사민, 권사악, 권응생, 김석견, 김응택, 김정민, 김춘용, 김호, 서사적, 손노, 손시, 손엽, 신사충, 유복례, 이광후, 이구갑, 이눌, 이몽룡, 이몽성, 이선조, 이세호, 이순선, 이용갑, 이의잠, 이창후, 이홍간, 이후근, 장계현, 정원, 최원용, 최진립, 의흥의 권황, 이경천, 홍경승, 청송의 조종악, 영일의 김우결, 김우정, 김우호, 김원용, 김현룡, 흥해의 박몽서, 안성절, 이대립, 이대인, 이설, 이화, 정삼계, 정삼외, 정인헌, 진봉호, 최준민, 최흥국, 호민수 등 곳곳의 의병들이 참가했다.

또, 하양현감 조윤신, 경주판관 박의장, 안동에 머물고 있던 경상좌병사 박진이 보낸 군관 변응규, 영천군수 김윤국, 신녕현감 한주, 하양현감 조윤신을 비롯한 일부 관군도 가세했다. 수복전을 계획할 때부터 영천만이 아니라 하양, 의흥, 청송 등지의 의병들까지, 그리고 관군들까지 모두 합세시켜 총력을 기울여 영천성을 되찾기로 결의한 데 따른 성과였다.

a  영천 의병장 정대임을 기려 세워진 사당으로, 이름은 충현사이다. 물론 창대서원 경내에 있다.

영천 의병장 정대임을 기려 세워진 사당으로, 이름은 충현사이다. 물론 창대서원 경내에 있다. ⓒ 정만진


창의의용군은 본래 영천군수 김윤국을 대장으로 선임하려 했다. 일본군이 처음 영천으로 쳐들어 왔을 때는 해발 900미터의 기룡산 묘각사로 피신했었지만, 의병이 일어난 후로는 산에서 나와 정상적 활동을 해온 그였다. 그러나 그는 극구 대장 자리를 사양하는 미덕을 보였다. 이윽고 대장 권응수가 단 위에 올라 4대 군율을 엄숙하게 선포했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적을 만났을 때 다섯 걸음 이상 물러나는 자도 목을 벤다. 맡은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장수의 명령을 듣지 않는 자도 목을 벤다. 적과 싸우는 중 대열을 벗어나는 자도 목을 벤다."

다음날인 7월 25일부터, 창의의용군은 전투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먼저 선봉대 400명을 선발하여 남천을 지키게 했다. 일본군들이 먹을 물을 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작전이었다.

성 안 왜적들 먹을 물부터 구하지 못하게 만든 다음...

왜란 발발을 우려하여 1591년 새로 벽을 쌓을 때 영천성은 성내에 우물을 세 곳만 팠다.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데에 주력한 나머지 식수 확보에는 소홀한 결과였다. 창의의용군은 그 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사다리만 놓아도 타넘을 수 있을 만큼 엉성하게 쌓은 점도 그랬지만, 마실 물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조선의 허술한 축성이 이제 와서는 조선군에게 전화위복으로 작용한 꼴이었다.

창의의용군이 선발대부터 강가에 주둔시킨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일본군이 식수를 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강가부터 지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26일이 되자마자 일본군은 식수를 얻기 위해 강으로 접근했다. 홍천뢰와 이온수 등이 군사 500명을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다가 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성벽 위에서 일본군 1천여 명이 포를 발사하여 아군 3명이 전사했다.

그런데 이 접전 결과 뜻밖의 성과를 얻었는데, 그동안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불국사 소속 승려 한 사람이 탈출해 나온 일이었다. 승려는 일본군이 27일을 기해 총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창의의용군은 26일, 영천 의병장 정세아와 정대임의 의견에 따라 군대를 역할별로 편성했다. 강쪽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는 남문 일원은 지리를 잘 아는 영천 의병들이 맡고, 상대적으로 평탄한 서북쪽은 타 지역 군사들이 공격하기로 했다.

지리 잘 아는 영천 의병 절벽쪽 남문 공격, 타지 의병들 평지쪽 서문 공격

성의 남문과 동쪽 방향에는 중총 정대임, 우총 최문병, 찬획종사 정세아, 찬획종사 정담, 영천군수 김윤국, 의병장 조희익, 신준룡, 이번, 조덕기 등이 지휘했다. 이때 정천리는 특수 임무 수행을 위해 지대가 높은 마현산에 주둔했다.

서북편에는 대장 권응수, 경주판관 박의장, 좌총 신해, 선봉장 홍천뢰, 신녕현감 한주, 하양현감 조윤신 등이 포진했다. 이때 영천에서 가장 많은 의병군을 이끌고 있던 정세아는 자신의 군대를 권응수가 지휘하는 서북쪽 공격진에 넘겨주었다.

a  창대서원 강당 건물이 발 아래를 흐르는 영천 남천을 바라보며 웅장하게 서 있다. 과거에는 창대서원이 서 있는 남천 북쪽 고지대가 영천의 중심지였고, 영천읍성도 이곳 일원에 있었지만, 지금은 남천 건너편 들판 지대가 영천시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창대서원 강당 건물이 발 아래를 흐르는 영천 남천을 바라보며 웅장하게 서 있다. 과거에는 창대서원이 서 있는 남천 북쪽 고지대가 영천의 중심지였고, 영천읍성도 이곳 일원에 있었지만, 지금은 남천 건너편 들판 지대가 영천시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 정만진


27일, 창의의용군은 총공세에 나섰다. 동남쪽은 아군이 방패와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넘으려 하자 적이 문을 열고 반격에 나섰다. 적들은 의병군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고 단순에 섬멸하려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백 명의 아군 선봉대는 용감히 돌진했고, 잠시 적의 총포에 주춤하기도 했지만, 정대임이 앞장서서 전투를 독려하자 이내 전세가 갈라졌다. 적들은 다시 성 안으로 후퇴했고, 아군은 성문을 부수고 짓이겨 쳐들어갔다. 마침내 정대임이 적의 대장 법화(法化)의 목을 베었다.

화공의 전형적 성공 사례로 평가받는 영천성 수복 전투

서북문 쪽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에는 적군 1천여 명이 성 밖으로 뛰쳐나와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지만 권응수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수십 명을 참수하자 아군의 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윽고 아군은 성문을 뚫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서북풍이 불었다. 영천 지역은 해마다 7∼8월 중 한때 '건들매'라는 이름의 서북풍이 불었다. 건들매는 나락을 쓰러뜨리고 감을 나무에서 떨어뜨릴 만큼 대단한 강풍이다. 이 서북풍을 기다려 마현산 높은 곳에서 정천리 부대는 기다리고 있었다.

정천리 부대는 모래와 재를 성 안으로 날려 보냈다. 일본군은 총을 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정천리는 포로로 잡혀 있던 1천여 명을 안전하게 피신시킨 후, 23일부터 준비해 두었던 마른 풀과 나무에 불을 붙여 성 안으로 던졌다. 건들매는 불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적들은 불에 타서 죽거나, 불길과 연기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도 아군의 창칼에 목숨을 잃었다.

불은 하루 종일 타올랐고, 피비린내는 수십 리 밖에까지 진동했다. 다음날 확인해보니 아군 전사자는 80여 명, 부상자는 230여 명이었다. 적들 중 경주로 도주한 자는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안동과 경주를 잇는 보급로인 영천성을 빼앗긴 적들은 모두 상주와 경주로 물러갔다. 경상좌도의 상당 부분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안전 지대가 되었다.

a  영천읍성 남문 일원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조양각은 본래 공민왕 때 정몽주가 당시 영천부사 등 지역 선비들과 힘을 모아 건립한 정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인조 때 다시 지었다. 이 정자는 통신사들이 일본으로 갈 때 늘 들러서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영천읍성 남문 일원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조양각은 본래 공민왕 때 정몽주가 당시 영천부사 등 지역 선비들과 힘을 모아 건립한 정자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인조 때 다시 지었다. 이 정자는 통신사들이 일본으로 갈 때 늘 들러서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 정만진


많은 지역 의병들의 합동 작전, 관군의 협조, 지도부의 솔선수범과 지휘 능력 발휘가 어우러져 일궈낸 영천성 수복 전승은 이어 경주성과 울산성을 되찾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래서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의 해전이 1등 공로이고, 그 외에는 권율의 행주 싸움과 권응수의 영천 수복이 기대에 찬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를 한산대첩, 행주산성 대첩과 더불어 3대 쾌승으로 평가한, 위의 <선조실록> 1603년 2월 12일자 선조의 발언도 있지만, 이항복도 그 못지않은 상찬을 남겼다.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영천성 복성 전투가 임진왜란 중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라고 말했다.

"경상좌도가 안전해진 건 모두 영천전투 승리의 공"

류성룡도 1593년 12월 4일자 <선조실록>에 증언을 남겼다. 류성룡은 "신이 영남에 있을 때 영천 싸움에 대해 상세히 들었습니다" 하고 전제한 뒤 전투 전말을 선조에게 아뢴다.

"당시 권응수는 북문을 지키고 정대임은 남문을 지키면서 서로 약속하기를 '적이 그대의 성문으로 침범하여 오면 내가 달려가 베고, 나의 성문으로 침범하여 오면 그대가 달려와 베자'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6백여 명의 적을 베었으므로 경주와 의흥에 있던 적들이 모두 다 도망갔다고 하였습니다."

류성룡은 또 <징비록>에 '영천성을 수복함으로써 (중략) 일본군이 경주로 도망갔고, 이로부터 신녕, 의흥, 의성, 안동 등지의 일본군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게 되어 경상좌도의 군읍이 안전해졌다. 이는 모두 영천 싸움의 공로'라고 기록했다.

현대의 연구자들도 영천성 수복의 의의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최효식은 저서 <경주부의 임진 항쟁사>에서 '영천의 선비와 백성들은 (중략) 왜적을 거의 몰살시키고 복성에 마침내 성공하였다. 밀리고만 있던 조선군이 육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안동으로 통하는 왜군의 병참 기지와 통신망을 형성하였던 가운데 길을 차단하여 경상좌도의 수십 읍이 안전을 되찾았다. 그런 까닭에 영남에 교통이 열리고 군성(軍聲, 군대의 위세)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욱도 논문 <임란 초기 영천 지역 의병 항쟁과 영천성 복성>에서 '영천성 복성은 임진왜란에서 우리가 육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라고 평가한다. 정해은도 논문 <임진왜란기 영천 지역의 상황과 수령의 전쟁 대처>에서 '영천성 전투는 조선군이 육전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로 평가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4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받는 이치 대첩이 7월 8일에 있었으므로 7월 27일의 영천성 승리를 육전 최초의 승리'로 보는 것은 무리한 상찬이다.

a  창대서원의 사당 충현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분위기가 과연 신도다운 느낌을 준다. 사진의 왼쪽 담장 너머에 정대임 의병장 신도비가 있다.

창대서원의 사당 충현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분위기가 과연 신도다운 느낌을 준다. 사진의 왼쪽 담장 너머에 정대임 의병장 신도비가 있다. ⓒ 정만진


문화재청 누리집은 '해유령 전첩지(蟹踰嶺戰捷地)'라는 이름을 가진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산38번지 일대를 '임진왜란 때 왜군과의 육지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곳'으로 규정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39호로 지정되어 있는 해유령 전첩지에는 이곳 싸움을 이끈 신각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높이 10.6m의 기념비가 있다.

해유령 승전과 이치 대첩은 관군이 주도했다. 따라서 영천성 수복전 승전은 '의병이 중심이 되어 이룩한 첫 번째 대규모 육지전 승리' 정도로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 그렇게 의미를 부여 한다고 해서 영천성 수복전 승리의 의의가 결코 반감되는 것도 아니다.

의병이 중심되어 이룩한 육지전 대규모 첫 승리

물론 정부가 발행한 7차 교육과정 '국정' <국사 교과서>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에 영천성 수복 승전에 관하여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영천성 수복 전투 승리는 분명히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뚜렷한 쾌승이기 때문이다.

영천성 터 둘러보기

임진왜란 당시 남문 자리였던 곳은 조양공원이라는 이름의 시민 휴식처로 조성되어 있다. 정몽주 등이 공민왕 때 세운 조양각이 이곳 볼거리의 대표이다. 물론 현재의 조양각은 고려 말기 건물은 아니고, 본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서 전소되었고, 지금 것은 인조 때 재건한 것이다.

공원 안에는 구한말 의병을 일으켰던 삼남의진을 기려 세워진 기념비, 소설가 백신애 기념 표지석, '황성옛터' 노래비, 여러 지방 수령들의 선정비도 있다.

답사 순서로는 영천문화원 앞에 주차를 하면, 먼저 삼남의진비와 황성옛터 노래비를 보게 된다. 이어 조양각을 본다. 조양각이 강물을 앞에 두고 높은 절벽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 후 강변으로 내려가 걸어서 200미터 가량 서쪽으로 가면 창대서원이 나온다. 정대임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서원이다. 강당, 사당, 신도비 등을 둘러본다. 창대서원에서도 역시 천혜의 해자를 거느리는 영천성의 지형을 확인한다.

다시 조양공원으로 돌아올 때는 강변 아닌 도로를 이용한다. 그렇게 오면 조양공원에 닿았을 때 자연스레 선정비 군, 백신애 표지석, 통신사 표시 각종 조형물 등을 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영천성 수복 이후 승전의 공로를 치하하는 조정의 포상이 있게 됩니다. 기사가 길어서 이 부분은 별도로 이어서 쓰겠습니다.
#영천성 수복 #권응수 #정세아 #정대임 #이항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4. 4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5. 5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