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가을 무렵이었다.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의 아들과 나의 기억들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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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가을 무렵이었다.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의 아들과 나의 기억들을 되돌아본다.
학교 근처에 자취를 하는 아들이 졸업 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집으로 왔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스쳤다. 아들이 대학시절을 즐겁게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한 탓일 것이다.
아들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며칠 동안 말도 하지 않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아 내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상담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전화로 상담을 문의하니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래도 죽진 않아요"라는 여유 있는 상담사의 말이 돌아왔다. 섭섭했다. '자기 자식 아니니까 쉽게 하는 말'로 들리는 속 좁은 엄마의 불평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아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유를 알려고 다그쳐 물었다. 그 친구가 어렵게 꺼낸 말은,
"아들이 동성애자입니다." 듣는 순간은 그냥 멍하였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시간이 정지됐다.
"이게 뭐지? 대체 이게 뭐지?" 생각도 멈추고 심장도 멈추는 느낌이었다.
바로 미국에 사는 여동생에게 전화해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동생이 말했다.
"한쪽에 많은 수의 이성애자가 있고 다른 한쪽에 적은 수의 동성애자가 있어. 그리고 그사이에 또 다양한, 적은 수의 사람들이 존재해. 아들은 적은 수의 동성애자일 뿐인 거야. 아무 문제 없어."동생의 말은 무지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었고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무척 위로가 됐다. 마음을 진정하고 누워있는 아들의 뒤에 대고 말했다.
"너 고민 있지? 난 들을 준비 되어있어. 얘기해줘. 기다릴게." 이틀이 지나도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하여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내 아들.너의 고민을 엄마는 벌써 눈치챘다."편지의 중간에 동생이 해준 말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인 것처럼 썼다.
"지구가 뒤집어져도 엄마는 네 편이다." 이 문장에는 엄마의 마음을 알리려고 밑줄까지 그었다.
"괜찮아, 사랑해."머리맡에 놓인 짧은 편지를 한동안 하염없이 들여다보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참 후, "엄마 밥 주세요"라는 너무도 반가운 소리에 얼른 밥을 차렸다. 아들은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곧바로 학교로 갔다. 아들은 무사히 졸업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 후 '왜 아들이 동성애자일까' 궁금했다. 우리 가정은 화목하고, 나를 넘치게 아껴주시는 시아버님, 착한 남편과 지금까지 감사하게 잘 살아왔는데, 왜? 이유가 알고 싶어졌다. 제일 먼저 나와 같은 입장의 부모를 만나고 싶었는데, 도무지 만날 길이 없었다.
그렇게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긴 고독의 시간은 철저히 나의 몫이었다. 그 기간 나는 마음 깊숙이 숨겨놓은 욕심을 내려놓고 나를 다시 되돌아보는 단련의 시간으로 삼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 생애 가장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후에
'친구사이'라는 게이인권단체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게이를 아들로 둔 부모를 만났고 우리 아들과 같은 성소수자 당사자 친구들을 만났다. 이곳에서 궁금한 모든 답을 얻었고 마음의 부자가 되었다. 지난 시간 동안 비싼 돈을 내가며 받았던 상담에서, 오히려 상처받고 보냈던 시간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큰 결심을 하고 이곳을 찾아간 나의 결정에 감사한다.
마음 깊숙이 고독이 자리 잡았던 많은 성소수자들을 만나며 조금씩 치유됨을 느낀다. 여기가 난 참 편하고 좋다.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했던 "성소수자는 모여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성소수자도 모여야 하지만 부모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반쪽 만난 아들, 우린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