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장흥리 숙종 사제문비(肅宗 賜 祭文碑)>
김종신
제문을 번역한 안내판에는 '국왕은 신하 예조좌랑 이안국을 보내어, 증도승지(贈都承旨) 조지서의 영전에 유제하노라~서연(書筵)에 재직했으니, 직책은 보덕(輔德)이었다네. 사악함을 막고 착함을 펼치고, 이치 나타내고 욕망은 막았네. 동궁이 생각지도 듣지도 않으니 마치 물에다 돌 던지는 격이었네. 벽에다 쓴 여섯 개 글자는, 보는 사람들 얼굴빛이 변하였네.~말의 기운은 더욱 엄하게 하고, 강학 권유를 날로 강하게 했네. 사람들은 나를 위해 두려워하지만, 나로서는 나의 직책 다해야겠도다. 어지러이 뒤집힌 시대 만나서, 몸이야 시골로 돌아왔지만, 충직한 것 탈로 잡아, 그 원한 혹독했도다. 마침내 사화에 걸려들어, 자신은 죽임 당하고 일족 멸하니, 하늘과 땅이 캄캄해졌다네.~애써 지킨 충절과 곧은 지조는, 쇠처럼 단단하고 화살처럼 곧았네. 행실은 세상의 으뜸가는 스승이 되고, 문학은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다네.~제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노니, 영은 이르러 흠향(歆饗)하시기를.(경상대학교 허권수 교수 번역)'고 적혀 있다.
비각을 나와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건너 작은 연못가로 걸었다. 겨울 철새는 나와 저의 거리가 가깝지만, 연못을 건너 자신에게 못 올 것을 안 것인지 유유히 한 발로 서서 지 할 일을 한다. 연못을 거닐며 선생의 삶을 돌아보았다.
조선 시대 성종은 학문과 명망이 높은 두 명에게 세자(연산군) 교육을 맡겼다. 조지서와 허침이다. 두 명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연산군은 툭하면 수업이 불성실한 자신을 성종에게 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조지서를 싫어했다. 허침은 부드럽게 타이르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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