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에게 인사하는 반기문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2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한 후 공항철도를 이용해 서울역 대합실에 도착해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권우성
2003년 말부터 한국의 유엔 사무총장 입후보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차기가 아시아 순서였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멀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역대 유엔사무총장은 중립성향 국가 출신 인물 중에서 강대국들이 협의해 뽑았기 때문에 비관론이 많았다.
그리고 2004년이 됐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으로 노무현 정부의 대외전략을 이끌었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반 전 총장의 대선 도전이 거론되기 이전인 2014년 5월에 출간한 회고록 <칼날 위의 평화>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반기문 장관이 한국도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낼 필요가 있다며 외교부가 추천하는 3인의 후보 명단을 순위별로 적어 왔다. 1, 2순위는 직업외교관이 아닌 외교장관 출신자들이었다. 3순위는 반기문 장관 본인이었다."'순종적인 모범생' 반기문이 '권력 의지'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이 전 장관은 일단 후보 문제는 빼고, '유엔 사무총장 도전 적기'라는 외교부 의견만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복병이 등장했다가 사라졌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었다. 주미대사로 내정되면서 일찌감치 유엔 사무총장 출마 의지를 피력한 그는 한국의 '사무총장 후보' 레이스에서 가장 앞서나갔으나, '삼성 엑스 파일 사건'으로 대사로 발령 난 지 7개월 만인 2005년 7월 물러나고 말았다.
그해 가을께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를 정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해졌다. '반기문 카드'로 마음을 굳힌 당시 이종석 NSC 사무차장은 정동영 NSC 상임위원장, 권진호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의 찬성을 얻은 뒤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수락하면서 이해찬 총리의 의견도 들으라고 요청했고, 이 총리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노무현 정부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로 반 전 총장을 선택했을까.
"반 장관 정도의 외교적 역량을 지니고 있으면서 미국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인물이 정확히 균형외교의 지점에 서서 북핵 및 전략적 유연성 등 한미 현안에서 미국을 설득한다면 일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유엔사무총장이 되려면 미국과 가까운 만큼 중국, 러시아 등과도 친선을 유지하며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반기문 장관이 유엔 총장 후보가 된다면 반 장관 스스로 균형점을 찾을 테니 우리의 균형 외교는 그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이종석, <칼날 위의 평화>, 2014년)'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균형외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핵심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만약 홍석현 회장이 주미대사에서 낙마하지 않고 출마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종석 전 장관은 "홍 회장이 당선됐을 것으로 본다"면서 "반 전 총장이 당선된 데는 '반기문 개인'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 기본 토대는 한국의 국가역량과 노무현 정부의 '균형외교'였다"고 분석했다. 노무현 정부가 미국 일변도도 아니고 중국에도 기울어져 있지 않다는 국제적인 인식이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노무현은 반기문 선거대책본부의 총괄본부장격이었다""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 선거대책본부의 총괄본부장격이었다…방한하는 외국 고위인사들도 빼놓지 않고 청와대로 불렀다. 심지어 스리랑카의 위크라마나야카 총리가 방한했을 때는 '스리랑카에서도 후보를 낸다는데 그래도, 기회가 되면 도와달라'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스리랑카의 경우 유엔 군축회담 사무차장을 역임한 자얀티 다나팔라를 일찍부터 후보로 확정하고 득표활동에 들어간 상태였다."(최광웅,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2016년)2006년 2월 반 장관의 유엔 사무총장 출마가 공식 발표된 후 8개월간의 선거운동 기간 노 대통령은 이집트·알제리·아랍에미리트·코스타리카·아제르바이잔 등을 찾아다녔다. 그 이전 한국 대통령들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외국 정상들을 만날 때마다 우선적으로 '반기문 지지'를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할 급박성이 없는 아프리카 일부 국가 정상들을 일부러 만나면서 반 장관을 배석시켰고, 자신이 직접 만나기 어려운 지도자들에게는 권진호 안보보좌관 등을 특사로 보냈다.
또 아프리카와 유럽에 영향력이 있는 프랑스가 '반기문 지지' 대가로 요구한 '항공연대 기여금' 제도에도 응했다. 2007년부터 우리 국민의 해외 항공료에 포함된 1000원의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이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정부 안팎의 숱한 경질 요구에도 반 장관의 외교부 장관 자리를 지켜줬다. 유엔사무총장 출마 발표 직후인 2006년 4월 동원호 피랍자 석방교섭이 늦어지면서 정부의 소극적인 협상 태도와 함께 반 장관 책임론이 떠올랐을 때도, 그해 7월 북한의 대포동2호 미사일 발사와 이에 따른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가 이어지면서, 한나라당이 반 장관을 포함한 외교·안보라인 전면 교체를 요구했을 때도 이를 거부했다.
이 무렵 청와대 내부에서는 반 장관의 거취와 관련해 10번 정도의 보고서가 올라갔으나, 노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박남춘 전 청와대 인사수석 대표집필, <대통령의 인사>, 2013년). 이광재 전 지사에 따르면 당시 노 대통령은 "욕은 내가 먹는다, 남북한 문제 해결을 위해 유엔사무총장 자리가 매우 중요하다"며 이를 물리쳤다.
"반기문, 전화는 하면서 왜 문상은 안 왔나? 권 여사가 정말 서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