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제, 무시, 물화책 표지
사월의책
원인을 알아야 처방을 내놓을 수 있듯, 문제를 알아야 개선할 수 있다. 문제가 지엽적인 요인에서 출발한 게 아닐 때, 표피 아래 깊이 자리잡은 문제에서 파생된 것일 때 치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정확한 진단은 섬세하고 진득한 관찰을 요하며 대응은 근본적인 문제를 완화하고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모두 불편하고 거추장스런 작업이다.
한국 사회를 대상으로 이와 같은 작업을 묵묵히 행한 책이 있어 소개한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과거와 현재가 상호작용하는 복잡다단한 공동체를 대상으로 일관된 흐름을 찾아 파고들어 마침내 근본적인 문제를 끄집어내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 문제를 바로잡는 건 오롯이 이 책을 읽는 독자와 한국사회의 역할이다.
연세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원식씨의 <배제, 무시, 물화>는 기존 사회비판이론의 틀을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현대사회에 유효한 비판이론을 모색하고 이를 한국사회에 적용해 구체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책이다. 저자는 이 같은 논의로부터 한국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실천적 과제를 독자에 제안하고자 한다.
모두 8장으로 구분된 책은 앞 4장을 할애해 기존 비판이론을 검토하고 유효한 비판론을 모색한다. 이후 이어진 4장에선 한국사회의 근본문제를 거침없이 파헤쳐 드러낸다. 저자가 수면 위로 올린 근본문제는 모두 세 가지로 경제적 배제와 문화적 무시, 삶의 물화가 그것이다. 저자는 지난 수 십 년 간 이와 같은 현상이 스스로를 강화하며 사회구성원을 조금씩 탈락시켜 폭압적 지배체제를 공고히 해왔다고 주장한다.
경제적 배제는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세계적 흐름이 사회를 급속히 양극화시키고 이로부터 약자를 경제적으로 도태시키는 것을 뜻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은 사회 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더욱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오늘날 기계화되고 분업화된 경제체제가 더는 다수의 착취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제적 배제의 흐름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적은 일자리를 놓고 다수가 경쟁을 벌이고 그로부터 소수만이 살아남는다. 배제에 대한 두려움은 다수의 수평적 연대 대신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을 가능성이 있는 자, 선택받을 수 없는 자 사이의 구분과 갈등을 낳는다.
문화적 무시는 문화적 자산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받게 되는 여러 종류의 무시를 가리킨다. 상대적 주류가 비주류의 요구를 무시하고 부당한 억압을 가하는 게 일반적인 형태로 계급과 성별, 학벌, 외모, 인종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문화적 무시가 만연한 사회에서 다수자는 소수자의 입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고 실제로도 기울이지 않는다. 그로부터 무시의 매커니즘이 심화되고 갈등은 격화된다.
삶의 물화는 물질일 수 없는 삶이 물질화된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 등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체제가 시민의 일상적 삶에 침투해 삶 자체를 물질화시킨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 다종다양한 가치가 물질적인 논리로 획일화된다. 다양한 직업관이 연봉이 얼마냐 따위로 획일화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물화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노동자 파업과 세월호 침몰참사, 환경운동 등 각종 사회적 의제에서 경제논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해 여러 가치를 밀어내는 모습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물화된 개인이 물화된 개인을 낳고 물화된 사회가 물화된 사회를 낳는다고 우려한다.
경제적 배제와 문화적 무시, 삶의 물화라는 세 갈래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을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답을 구하고픈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라 판단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적 과제는 우리 사회의 사회적 불의와 병리현상을 면밀히 분석하고 동등한 자유의 실현이라는 목표 아래 차이 나는 존재들의 민주적 연대를 형성해 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데올로기적 왜곡을 극복하고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초하여 스스로의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는 주체들이 형성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263p신규환, <질병의 사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