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든 시인의 어두운 마음을 다림질해준 그녀

김환재 시인, 등단 17년 맞아 첫 시집 <친구를 잊기 위하여> 상재

등록 2017.02.13 15:39수정 2017.02.1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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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환재 시집 <친구를 잊기 위하여> 표지

김환재 시집 <친구를 잊기 위하여> 표지 ⓒ 김환재

한 시인이 시집을 내면서 "부끄러웠다, 시집 한 권 내지 않고서 시인으로 불리어 왔다는 것이 / 부끄럽다, 시대는 이리도 캄캄하고 혼돈스러운데 시집을 낸다는 것이 / 질박함이 사라져가는 자본의 시대에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 / 그러나, 시마저 사라지면 가난한 우리들의 삶을 누가 관심 가지고 어루만져 주랴?" 하고 말했다.

이렇게 소박하고도 진지한 처녀 시집 상재 소감을 세상에 밝힌 시인은 2001년 <작가정신>에 '친구를 잊기 위하여'를 발표하며 등단했던 김환재 시인이다. 올 2월에 교직에서 정년 퇴임하는 시인은 시집 이름도 첫 발표 작품명을 그대로 써서 <친구를 잊기 위하여>로 정하는 소박함을 보여주었다.


시대의 아픔을 잊지않고 노래하는 시인

2017년 2월에 나온 시집<친구를 잊기 위하여>가 '촛불'을 노래하지 않을 리 없다. 만약 '촛불'을 노래하지 않고도 2017년 2월에 시집을 출간하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국민의 인정을 받는 대단한 '블랙리스트 예술인'이 될 것이다.

김환재 시인은 경북 김천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촛불 집회 장소는 김천역이다. 역은 달려온 기차가 잠시 멈추었다가 달려가는 곳이다. 시인의 촛불 시 '촛불이 달린다'를 읽어본다.

달이 흰 이슬 머금은 백로날 저녁
역 광장에 촛불들이 웅성거린다
마을 경계에 배치한다는 사드를 막아야 된다고
촛불들이 TV 끄고 잠을 잃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온 촛불의 함성
-사드는 아니다
무궁화 열차가 지나가다가 따라 한다
-전쟁 무기는 절대 안 되고 말고
광장의 늙은 소나무도 머리에 대자보를 걸었다
-우리 아이들 살 곳에 화약고라니 택도 없지
폭염 달구던 지난 여름
이웃 별마을에서부터 푸른 촛불들이 먼저 모였다
팔뚝 걷어부치고 소리 지르며
새벽까지 찬 이슬 맞았다고 한다
손에서 손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오늘은 여기 역 광장에까지
촛불이 촛불을 들고 어둠을 밝힌다
경부선 작은 도시 김천역에서
열차가 촛불을 전해 받아 달린다
세상 모르는 캄캄한 잠을 향해서
어둠 속에 가로누운 추풍령을 넘고자
촛불이 달린다
열차가 소리친다
달이 만천하를 비춘다


그러나 첫 시집이다. 20년 가까이 시인으로 살았으니 촛불과 사드 같은 '현대사'만 시집에 실렸을 리 없다. 고향, 공립 중등학교 교원으로 재직한 탓에 전근을 다니면서 살고 보고 느꼈던 경상북도 각지의 사람살이, 개인적 서정 등 시의 제재는 다양하다.

카투리가 새끼들 양식 구하러 다니다가 동사했는데


가장 많은 편수를 기록하고 있는 제재는 울릉도이다. 아무려면 시인 본인이 육지 태생인 만큼 동해 한가운데에 있는 섬이 조금은 더 특별하게 느껴졌을 법도 하다. '첫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울릉도 시 한 편을 읽어본다.

십이월 눈은 내리고 떠난다
들판을 뒤덮은 갈색 잎들 위로
백색의 방어선이 구축된다
흥분한 티브이가 방을 따뜻하게 덥혀 주지만
다음 날 아침 마을 입구에서
까투리 한 마리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어린 새끼들 양식 구하러
얼음 골짜기에서 마을로 혼자 나왔다고 한다
눈발 속을 헤매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변을 당했다니
새끼들은 어찌 하려나
섬은 늘 이맘 때 길이 막히고
이주자가 또 생겼다는 소식이 들린다
사람들은 남고
사람들은 떠난다
눈이 내리고 까투리처럼 떠난다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오지 않을
저 땅으로 첫눈과 함께
떠난다

전반부는 카투리를 노래하고 있지만 이내 사람살이 이야기로 돌아선다. 사람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인에게는 까투리도 사람도 같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얼어죽은 카투리가 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을 때 그것을 '소식'으로 퍼나른 주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정확하게 짚고 있다. 사람들은 '까투리처럼' 살고, 떠나고, 그리고 언젠가는 그렇게 고독하게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 개체의 일상은 사회적 삶과 달리 그렇게, 언제나 구조적으로 분석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에 부합되게 한평생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오롯이 개인적 사생활로만 메워지는 일상도 무수하다. '다림질'은 그런 점에서 이른바 '순수시'의 절창을 보여준다.

어둠이 오는
방 안에 앉아 다림질을 한다
거칠거칠한 잠바
우글쭈글 고르지 못한 남방
은근한 불로 천천히 시작하는 다림질
옷은 순식간에 펴지고
문 밖까지 다가온 어둠은
아직 생기 그대로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닌다
옷을 다리면서
어둠 속에서 환히 웃던 그 여자
웃음을 다림질하고
빛을 다림질하고
끝내
내 서성거리는 어둠까지 다림질해 주던 그 여자
문 밖에 서성이는 어둠은 어느덧
편안해진 듯
마당에 골고루 펴지고
문 밖을 보면서
옷은 하나씩 다려지고 있었다
어둠이 오는 방 안에서
문을 활짝 열고
식구들의 옷을 다림질하고
드디어
하루 동안 걸어온 길과
주름이 굵게 간
자신의 생의 귀퉁이마저
다림질 하던 그 여자
생은 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주름진다는 것을
주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옷의 속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림질하던
그 여자

시인의 화법은 '그 여자'에서 빛나는 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 여자'가 아내, 어머니, 정인 등의 정체성을 드러내었으면 이 시는 결코 '내 서성거리는 어둠까지 다림질해 주는' 형상화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 여자'가 '이 여자'나 '저 여자'였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다림질'은 사회 현상을 담지 않은 시를 써도 김환재 시인이 충분히 재능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2월 19일에는 출판 기념 '북 콘서트'도 개최

시인은 '자서'에서 '오랜 시벗들의 권유와 세심한 배려로 첫 시집을 낸다. 우리가 사는 시절이 지금보다 조금씩 더 따뜻해지고 누추한 손일지라도 서로 맞잡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집을 낸다.'라고 밝혔다.

시벗들은 시인이 첫 시집을 상재하도록 격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 콘서트도 준비했다. 북 콘서트는 2월 19일 오후 3시부터 다섯 시까지 김천 시립도서관에서 열린다. 김천시 평화동 374-1번지를 주소로 둔 시립도서관은 김천역에서 10분만 걸으면 닿는다.
덧붙이는 글 김환재 시집 <친구를 잊기 위하여>, 문예미학사, 2017년 2월, 120쪽, 9천 원.
#김환재 #김재환 #친구를 잊기 위하여 #촛불 #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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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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