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의 역사>.
예지(Wisdom)
저자는 인종차별주의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에서 찾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말을 하는 사람과 목구멍에서 브르(br) 하는 소리밖에 낼 줄 모르는 '이방인'(Barbare)으로 구분했다. 그리스인들은 그들 자신을 다시 자유인과 여자, 아이, 노예로 구분해 자유인에게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권을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최초의 인종차별적 사상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이방인들이 그리스인들의 "태생적인 노예"이며, 그리스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남자는 '형상' 역할을 하고, 여자는 '질료' 역할을 하는데 형상이 질료보다 우월한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딸의 수태는 그 자체로 규범에 대한 일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리면 "최초의 탈선은 남성 대신 여성을 출산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성의 발달이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합리적 이성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던 계몽주의 시대에도 인종차별주의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저자는 "이성의 승리가 비이성적 믿음들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며 "오히려 비이성적인 믿음을 '이성적'으로 보이게끔 만들고 '개념적' 언어로 다시 표현하며 그 믿음들에 부족했던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믿음들을 새롭게 되살리는 경향을 보인다"고 설명한다.(185쪽)
저자에 따르면 인종을 뜻하는 'race'란 단어는 '이치, 범주, 종류'라는 뜻의 라틴어 'r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는 이 사실을 지적하며 "'race'란 낱말이 출현하는 순간부터 인종차별과 합리주의는 필연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었던 것 같다"(191쪽)고 지적한다.
볼테르, 엠마누엘 칸트 등 당대의 유명한 지성들도 인종차별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칸트는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남자보다 아래에 있어야 하고, 흑인은 인류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을 차지하며, 유대인은 "탐욕스런 인간",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관용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볼테르는 백인과 흑인이 "전적으로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이나 흑인은 원숭이와 결합해 괴물 같은 존재를 낳을 수 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맹인밖에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프랑스 서부, 에스파냐 북부에 거주한 천민집단 '카고'에 대한 차별은 인종차별주의가 뒤집어쓴 '이성'과 '합리성'의 외피가 얼마나 기만적인지 보여준다. 근대 외과학을 확립한 외과의사 암브루아즈 파레를 비롯한 여러 학자는 16세기 말까지 '카고'를 나병환자의 후손, 즉 반나병환자이거나 의사 나병환자, 혹은 자신이 나병환자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나병보유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7세기 초 프랑스에서 나병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카고'는 그대로 남아 있자 사람들은 이제 '카고'에게 인종적 기원을 부여해 하나의 민족 범주를 만들어내려 했다. 서고트인, 사라센인, 스키타이계 알라니인 등 다양한 민족이 '카고'의 선조로 거론됐다.
19세기가 되자 의사들은 이번에는 '카고'가 나병이 아니라 갑상선과 관련 있는 '크레틴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1892년 프랑스 과학향상협회 연례 학회에서는 다시 수많은 학자들이 카고의 나병 기원설에 대한 주장이 옳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카고'를 "근거 없는 의혹의 희생자"라 칭하며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증오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고안해 내야 하는 것이 이 타자가 아닌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카고들은 우리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만큼 더 진심으로 증오하는 것은 아닌지."(137쪽)
"홀로코스트는 유일한 사건" 주장 뒤에 숨은 것은...이 책은 홀로코스트, 혹은 쇼아라 불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설명하면서 인류가 인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다른 어떤 대량학살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하고도 '유일한' 사건이다.
"그래서 집단학살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홀로코스트는 유일한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폭력을 동반하며 일어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홀로코스트-쇼아는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사건이다."(279쪽) "또한 쇼아는 용서될 수도 잊힐 수도 없다는 것,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심각한 범죄라는 것, 그리고 쇼아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행위는 이미 범죄-내지는 범죄적 성향-에 속한다는 것이다."(279~280쪽)하지만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최근의 대량학살 연구들은 홀로코스트를 유럽이 벌인 식민주의적 폭력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역사학자 박노자는 "'종족 절멸'은 히틀러가 식민주의 이론과 실천에서 얻은 아이디어이고, 방법(대형 수용소)도 아프리카에 대한 독일 식민주의의 경험에서 배운 것"(<야만의 역사> 10쪽)이라고 지적한다.
사실 독일이 아프리카에 세운 강제수용소는 스페인, 영국 등이 쿠바, 남아프리카에 세운 강제수용소를 모방한 것이었다. 규모는 좀 작을지언정 '종족 절멸'을 목표로 한 끔찍한 인종학살도 홀로코스트가 처음이 아니었다. 백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태즈메이니아족을 한 명도 빠짐없이 말 그대로 '절멸'했고, 이탈리아도 '에티오피아인이 없는 에티오피아'를 꿈꾸며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에티오피아인 25만 명을 살해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태너드 등 일부 학자들이 '잊힌 홀로코스트', '또 다른 홀로코스트'라 부른 백인들의 인디언 학살은 폭력의 규모로만 따지면 홀로코스트 이상이었다. 데이비드 스태너드에 따르면 당시 살해당한 인디언 숫자는 5천만~1억 명, 비율은 전체 인구의 90%~95%에 달해 사망자수와 비율만 보면 아메리칸 인디언 학살, 즉 '미국인의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보다 더 심각했고, 학살 방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제노사이드: 학살과 은폐의 역사> 106~111쪽).
그런데도 홀로코스트가 이런 인종차별주의에서 비롯한 폭력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 이면에는 유대인의 유일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는 은밀한 인종차별주의가 깔려 있다.
"홀로코스트를 유일하게 만들 것은 유대인들의 고통이 아니라 고통을 겪은 유대인들이다. 다시 말해 홀로코스트가 특별한 것은 유대인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 신학전문학교 총장 이스마르 스코쉬는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이 "선민주의의 불쾌한 세속적 변형"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홀로코스트 산업> 87쪽)'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 속에 숨겨진 인종차별주의는 나치의 인종차별주의가 홀로코스트를 낳았듯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역사에 유일한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강력한 유대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져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벌이는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돼 왔다.
한 예로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 전쟁 당시 적국인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히틀러에 비교하면서 2차 홀로코스트의 위협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선전활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세계유대인회의 의장이던 나훔 골드만은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우리는 홀로코스트 시기에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이 더 이상 보호막이 될 수 없음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며, 홀로코스트를 이용해서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든 그 일을 정당화하던 버릇을 확실히 자제해야만 한다"고 비판했다.
이스라엘인들이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이스라엘인들은 마치 극장에 온 듯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가자지구 공습을 관람하고,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환호를 보낸다. 팔레스타인인 2220명이 죽고, 1만1231명이 크게 다친 가자지구 공습이 이들에게는 그저 재미난 구경거리였다. '스데롯 극장'이라 불리는 이 사진은 한때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였던 이스라엘인들이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가해자'가 됐다는 사실을 아프게 보여준다.
이쯤 되면 "쇼아-홀로코스트를 '일반화'하려는 모든 행위가 범죄-내지는 범죄적 성향-에 속한다"는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쇼아-홀로코스트의 '일반화'를 범죄로 몰려는 시도야말로 홀로코스트를 신성화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잔혹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범죄에 가깝다.
"희생의 기억이 삼켜버린 가해의 기억"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저자조차도 인종차별주의와 이어진 '홀로코스트의 유일성'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제껏 그래왔듯 인종차별주의는 앞으로도 여러 비극을 낳을 것이고, 인류는 오랫동안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저자가 빠졌던 덫을 피하기 위해 희생자 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 작가 요코 가와시마 웟킨스는 자전적 소설 <요코 이야기>에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나남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렸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한 맥락을 삭제한 채 한국인을 가해자처럼 묘사했다. 역사학자 임지현은 요코 가와시마 웟킨스에게 "희생의 기억이 삼켜버린 가해의 기억"이란 제목의 공개편지를 보낸다.
"희생의 기억이 삼켜버린 가해의 기억"이란 표현은 오늘날 세계를 위협하는 인종차별주의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영원한 희생자라는 의식, 이주노동자들이 우리 일자리를 모두 뺏고 있다는 의식, 무슬림이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의식, 그래서 우리가 저들에게 저지르는 차별과 폭력은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과거 홀로코스트 희생자였지만 오늘날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이스라엘 유대인처럼 말이다.
인종차별의 역사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지음, 하정희 옮김,
예지(Wisdom),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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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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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 나빠요"는 옛말, 동료에게 맞는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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