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도 모충각 모습
고용규
고하도는 목포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5㎞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목포 앞바다에 위치하고 있는 관문으로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내륙수로인 영산강을 연결하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바다 건너 유달산과 마주보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율도, 장자도, 이달도, 달리도가 서남해의 거친 파도를 막아주는 동시에 고하도를 가려주고 있어 탁월한 방어성을 담보해주는 입지환경이다.
명량해전(1597.10.25.)에서 승리한 조선수군은 당장 다가올 겨울을 보낼 장소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일본군을 견제하면서도 수군력 재건이 급선무였다.
이순신은 승전 직후 고하도에 삼도수군통제영(1597.10.29.)을 옮기는 한편 이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동헌 등 관아건물을 새로 짓고 수군진 운영에 필요한 선소와 군량미를 저장할 창고건물을 지었다. 발표에 나선 한국국제대학교 동북아협력연구소 이상훈 교수가 고하도 통제영설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조선수군 근거지 정착 ▲일본군 동태 관찰과 부역자 처단 ▲군량미 확보 ▲군선의 제조와 무기확보
조선수군, 고하도에서 전력보강해 고대문화재연구원 고용규 연구위원이 고하도진성 현황에 대해 설명했다. 성은 전체 길이 약 1225m 가운데 1105m 가량만 성벽을 쌓고 나머지는 성벽을 축조하지 않거나 높다란 바위 등을 성벽으로 이용했다.
성곽의 평면형태는 부정형이며 '큰덕골저수지' 제방을 제외한 골짜기와 60~80m 정도의 높지 않은 큰산-칼바위-말바위로 이어지는 능선을 이용하여 포곡식 산성을 쌓아 수군진성으로 이용했다. 1722년에 남구만이 쓴 <고하도유허비>를 보면 이순신장군이 고하도를 선택한 이유가 잘 나와 있다.
"옛날 선조 정유년에 통제사 이충무공이 병란을 맞이하여 병사들과 함께 하였다.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량미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군량미를 비축할 수 있고 전선을 정비할만한 곳을 찾던 중 얻은 것이 나주 고하도이다. 곳곳의 전진에 남은 곡식을 이곳에 쌓게 한 다음 군사를 모집하여 둔에 들게 하고 별장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선조실록> 권 97에는 조선수군이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옮겨(1598.2.16)가면서 수군전력을 증강한 기록이 나와 있다. 명량해전 직후(1597.9.17.~10.28) 병력 1000여명에 판옥선 13척이던 조선수군은 고하도(10.29~1598.2.16.)에서 병력 2000여명에 판옥선 53척으로 늘었고, 고금도(2.17~7.15)에서는 병력 7300여명에 판옥선 60~70척으로 늘어 승전의 기틀을 쌓았다.
호국사적지인 고하도를 관광명소화해야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최성환 교수는 뛰어난 경관과 다양한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는 고하도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점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2012년 고하도와 목포 북항지역이 연결되는 목포대교가 개통되어 고하도를 쉽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많은 목포시민들은 목포대교 개통과 함께 고하도가 이순신의 호국사적지로서 관광 명소화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개통 5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변화가 없습니다. 호국사적지로 개발한다는 논의는 수십년 전부터 들려왔지만 구체적인 노력과 정책실행이 동반되지 못했습니다. 고하도 발전과 역사공원화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기획하고 수렴할 체계적인 방안이 필요합니다."
고하도, 육지면을 최초로 재배한 곳고하도에서는 육지면을 최초로 재배한 곳이다. 1902년 일본의 목포영사로 부임한 와카마쓰 도사부로는 고하도가 육지면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미국산 육지면을 시험 재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