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라면 광고 캡쳐.
농심 짜왕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까지 짜장 라면을 먹을 줄 몰랐다.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먹을 줄 몰랐다. 내가 짜장 라면을 올바른 방법으로 끓여 먹은 것은 가스레인지보다 키가 커졌을 때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보통 할머니가 끓여주셨는데, 글을 배우지 못한 할머니는 짜장 라면을 일반 라면처럼 끓여주셨다. 면을 삶은 후, 물을 버리지 않고 수프를 풀어주셨다. 10년이 넘게 나는 짜장 라면은 원래 그런 줄 알았다. 설명서를 읽고, 정석으로 끓인 짜장 라면을 할머니랑 나눠 먹으며 함께 얼마나 웃었는지.
걷기 시작할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랐다부모님은 맞벌이로 늘 바쁘셨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집에 오면 할머니가 계셨다. 늘 내 식사를 챙겨주셨다. 날 학원에 보내는 것도 할머니 몫이었고, 나랑 만화 영화를 같이 보는 것도 할머니 몫이었다. 준비물 살 돈도, 초코우유 사 먹을 돈도 할머니 속바지에 있는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내가 아플 때면 나보다 더 아파하셨고, 내가 기쁠 때는 나보다 더 기뻐하셨다. 우리 할머니는 그랬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서운한 건 없었다. 늘 낮에 챙겨주시지 못한 사랑을 퇴근 후에는 챙겨주시려고 노력해주셨으니 말이다.)
우리 할머니는 항상 온화했다. 내가 학교에서 혼나도, 학원에서 혼나도, 집에서 사고를 쳐서 부모님한테 혼나도 할머니는 항상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대하셨다. 집에서 뛰어놀다가 흔들의자를 부셔 먹었을 때, 밤늦게까지 게임하다 혼날 때 등 할머니는 항상 내 편이었다. "그러면 안 돼"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잘못을 일깨워 주시고, "다음부터는 이렇게 하자"라는 말로 내 인성을 바른길로 이끌어주셨다. 당신의 자녀들 모두를 결혼시킬 때까지 키워서 그런 것일까. 연륜이 있어서였을까. 아무튼, 할머니는 항상 온화했다. 그렇기에 할머니 방은 항상 내 은신처이자 안식처였다. 나중에는 게임기를 할머니 방에 갖다 놓고, 할머니 방 TV에 연결해서 했으니 말이다.
그랬던 할머니가 나를 못 알아보기 시작하셨다. 치매 때문이다. 20살이 다 된 나에게 "준원이 어디 있냐"며 "갓난아기 지금 자고 있는데 불을 올려놓고 와서 데리러 가야 한다"고 하셨다. 밤 10시, 새벽 2시 등 가리지 않고 그러셨다. 내 눈에서 얼마나 눈물이 흘렀던지. 할머니가 치매 속에서도 나를 기억해주는 게 한편으론 고마웠지만, 가족이 잠든 새벽에 몰래 나간 할머니가 집에 찾아오지 못할까 봐 무섭기도 했다. 결국 친척들과 회의 끝에, 할머니는 요양원에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