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화축제' 가르친 페미니스트 선생님, 접니다

[페미니스트 키우기 ⑥] 사회적협동조합 청소년 친구들과 함께한 페미니즘 수업기

등록 2017.09.09 20:52수정 2017.09.09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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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열풍'을 넘어 '페미니즘 유행'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차별이 일상에 공기처럼 스며들어있고, 젠더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게 여전히 낯선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학교 같은 공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평등'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페미니스트로 자라나는 것, 그리고 페미니스트를 키워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각 분야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이가현

나는 사회적협동조합 '함께시작'의 '별별랩' 고등부 학생들과 페미니즘 수업을 하는 '페미니스트 선생님'이다. 이 학교엔 학생들이 자신의 한 학기 목표를 세우고 원하는 수업을 만들어 선생님을 초빙하는 시스템이 있다. 지난 3월 어느 학교에서 페미니즘 수업을 할 선생님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지원했다.

수업 전 처음 만난 학생들은 궁금한 것,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학교 안의 여성혐오나 생리·낙태 이슈, 미디어와 온라인을 통해 접하는 성 상품화 문제 등과 같이 뜨거운 이슈가 이들의 관심사였다.

또 한국에 보편화된 '여성혐오'라는 말이 사회 전반의 차별과 폭력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인지 묻기도 했다. 여학생들은 이미 온라인을 통해서 페미니즘을 접하고 여러 가지 글을 읽으면서 사회의 성차별을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이미 무언가 이상하고 불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지한 학생들은 같이 궁금증을 풀어나가며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한 학기의 수업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첫 수업 날, 학생들과 나는 우리가 같은 공동체에서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최소한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지켜야 할 약속들을 함께 읽었다. 장애인, 성소수자, 비인간 동물에 대해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이야기해보았다. 한 학생은 첫 수업 이후 '페미니즘이 너무나 엄격한 규율을 가지고 있고 자기검열을 하게 되어서 앞으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처음부터 너무 강하게 나간 건가',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시스젠더-이성애자-비장애-인간중심의 페미니즘을 추구하지 않는 나로서는 수업시작 전에 꼭 짚고 넘어가야할 주제였다.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학생들 간의 온도차가 있어서 어디에 맞춰야 할지 어려웠다. 나는 여학생들의 온도에 수업을 맞추기로 결심했다.

털, 젖꼭지, 비키니... 터놓고 말하는 수업

 '내가 들었던 혐오발언, 그때로 돌아간다면?'프로그램을 함께 하고 있는 학생들
'내가 들었던 혐오발언, 그때로 돌아간다면?'프로그램을 함께 하고 있는 학생들이가현

길고 긴 용어 정리와 마인드맵을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간에 진행한 뒤, 우리는 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지정성별 남성과 여성의 다양한 성기 모양을 사진으로 직접 보았다. 소음순의 모양과 색깔, 그리고 일명 '처녀막 재생수술'까지, 여성의 성기가 남성의 시각에서 아름답게 보일 것을 끊임없이 강요받는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제모는 왜 여성의 몫인가, 털이 많은 남성은 남자답다고 일컬어지지만, 털이 많은 여성은 왜 '관리 안 함, 지저분함, 웃김'으로 표현하는지 물었다. 왜 어느 곳의 털은 모조리 뽑아서 박멸시키고, 어느 곳의 털은 심거나 문신하기도 하는지도 주목했다.

젖꼭지도 빠질 수 없는 주제였다. 여성과 남성이 똑같이 패션쇼에서 상의 없이 등장해도 여성의 젖꼭지만 모자이크 처리되는 현실을 보고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여기서 나는 토론 거리를 하나 제시했다. 여성의 가슴을 활용한 시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지난 2008년 나꼼수 비키니 사건과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단체 '페멘'의 시위를 비교했다. 과연 가슴에 메시지를 적고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주체성을 훼손하는 것일까. 아니면 페멘의 인터뷰처럼 '벌거벗음은 성적 대상화의 정반대'인가. 한 학생이 이에 대해 고민하고 쓴 글은 아래와 같다.

"여성의 가슴을 이용한 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
(성적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음)

내가 모르고 있는 게 많아서 생각을 말하며 실수할까 두렵지만, 나는 여성의 가슴을 이용한 시위가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상상을 초월하게) '빻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과연 시위를 준비할 때 그들이 그렇게 소비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는데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보단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중략) 사람들에게는 그런 시위가 당황스럽거나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게 계속되면 이상한 줄도 모르는 법이다.

오히려 여성의 가슴을 이용한 시위가 잦게 일어난다면 먼 훗날 (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생물학적) 여성들의 농구게임 현장에서도 흔히 상의 탈의한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퀴어문화축제가 있는 주간에는 퀴어용어를 정리하고 세계의 다양한 퀴어문화축제 사진을 보았다. 올해 초 논란이었던 군대 내 동성애 처벌조항과 동성혼 합법화 이슈를 학습하기도 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생활 속으로 들어와 '만약 나의 가까운 사람이 커밍아웃을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생각해오는 과제를 내기도 했다.

강의뿐만 아니라 활동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 매우 즐거웠다. '코르셋 빨래하기'라는 프로그램은 불꽃페미액션이 '페미들의 성교육'이라는 행사에서 진행해본 적 있는데, 페미니즘 수업에서도 해봤다. 빨랫줄에 지금까지 자신을 억압해왔던 성차별주의나 여자다움·남자다움을 적고, 그것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빨래해서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인지 이야기해보는 게임이다.

한 학생은 자신이 중학생 때부터 달리기할 때면 앞머리를 잡고 총총거리면서 뛰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다 그렇게 하니, 자신도 뛸 때 이마가 보일까봐 앞머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 얘길 들으며 '(여자의) 이마가 보이면 추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없어지긴 했는데, 사실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억압이 있었구나 깨달았다. 이렇게 페미니즘 수업은 학생들과 선생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교류하면서 진행됐다.

"모르는 게 많았다, 많이 변했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

 학교
학교pixabay

1학기 수업을 마무리하고 각자 페미니즘 수업에 대한 평가서를 써서 공유했다. 그 내용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몇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아래와 같았다.

[질문 ①] 1학기를 마치고 난 후 드는 생각들이나 느낀 점은 무엇입니까.
A: "페미니즘을 널리 전파하고 싶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필수로 배웠으면 좋겠다."
B: "멍~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생각들에 불편한 부분을 발견했다."
C: "변화, 반성을 많이 했고, 외모로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D: "내가 갖고 있는 편견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부끄럽네요. 그렇지만 수업안에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고 인지하게 되어 다행입니다."
E: "페미니즘에 키워드 중 하나가 '해방'인데 왜 그런지 좀 알 것 같다."
F: "불가피할지 모르겠지만 전위적인 느낌이 들었고 성·몸·섹스 등에 비중을 많이 할애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평등 문제보다는...)"
G: "많이 변했다는 것. 내가 모르는 게 참 많았다는 점!"

[질문 ②] 1학기를 마치고, 변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습니까?

A: "친구를 만날 때, 가족과 이야기할 때 페미니즘을 빼놓지 않고 말한다. 외모에 대한 평가를 많이 조심하게 되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B: "엄청난 생각들의 변화, 성에 대해 많이 바뀌고 발전했던 것 같다."
C: "외모 지적을 잘 안 하게 되었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생각해보게 됐고, 엄청난 성들을 알게 됨. 혐오 발언을 안 하게 됨. 자신감이 생김. '섹드립' 안 함."
D: "수요일이 좋아요. 개인의 고민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학교 문화가 바뀌는 것 같아요. 모두의 변화. (개인적으로 더 조심하게 되면서 당당해지기도 했어요! 나의 성정체성 고민)"
E: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생각이 많이 들었고 생활속에 걸리는 부분들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F: "불평등한 여러 지점을 느낄 수 있었으나 메시지가 강렬하여 마음이 좀 불편했다. 조금 더 냉철하게 페미니즘을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됨."
G: "이성애를 전제로 발언하지 않게 됐다. 성소수자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자각하려고 노력 중!"

[질문 ③] 수업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A: "정말 유익했다. 여자의 차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자가 받는 차별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새로운 것을 주제로 삼았던 게 좋았다."
B: "나를 교정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생각도 들어 좋았다."
C: "나의 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고, 나도 모르게 받았던 억압들이 자유로워지는 느낌. 큰 위로가 되었다. 사실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었다."
D: "평소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던 단어들이 나오기도 하고 모두 불편·당황했을 테지만 같이 노력하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많이 말하고 많이 듣는 게 좋았어요."
E: "페미니즘의 핵심적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F: "숨기지 않는 과감한 대화? (약간의 부작용은 감수)"
G: "스스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고 그것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

[질문 ④]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떻게 개선되면 좋겠습니까?
A: "시간이 짧았다. 더 떠들고 싶다."
B: "없다."
C: "시간이 짧게 느껴짐. 남자들이 힘들어 하는 게 보여서 안타까움."
D: "시간이 늘 짧아요. 더해요! 더더!"
E: "좀 더 쟁점이 치열한 문제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보고 이해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F: "다른 의견을 쉽게 꺼내기 힘든 분위기. (남자라서 더 그럴 수 있음)"
G: "성폭력,성희롱 문제를 나중에 다룬다고 하셨는데 남성들이 있어서? 살짝 불편한 느낌이 있는 건 사실이다."

최근 한 초등학교 교사가 여성주의적 수업을 진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청과 학교에 항의가 빗발쳤다. 교사를 공격하는 이들은 '해당 교사의 구체적인 사상을 조사하고, 교육자로서의 재교육 내지는 교육 자격 박탈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교육이 필요한 건 페미니스트 교사가 아니라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비판적 시선을 갖추지 못한 이들 아닐까. 여전히 페미니즘 선생님이 필요한 이유이다.
#페미니스트 선생님 #페미니즘 수업 #학교 #성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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