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지 <파도야 놀자> 뒷면
비룡소
이수지의 <파도야 놀자> 그림책에는 우리 아이가 겪었던 처음 만난 파도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 글자 없는 그림책인 이 책에서는 제목이 아이의 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제목 '파도야 놀자'를 통해 파도에 대한 아이의 호기심과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을 알 수 있다. 면지와 속표지, 책의 겉싸개까지 책의 형식을 갖춘 모든 곳에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파도야 놀자'는 검은 색과 파랑색만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변화를 준다.
책의 겉을 감싸고 있는 겉싸개 앞쪽에는 여자 아이가 파도를 바라보는 뒷 모습이 그려져 있다. 파도를 향해 달려가는 것인지 뒤로 물러서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앞표지와 달리 뒤표지는 치마 가득 조개, 소라 껍질을 담고 있는 아이가 나온다. 앞표지에서 아이 옷은 회색이었는데 뒤표지 아이는 파랑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갈매기도 앞에서는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배경이었지만 뒤에서는 아이 머리 위에 앉아 있다. 면지도 겉싸개 표지와 비슷하다. 앞면지에는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추측되는 그림에 모래만 있고, 뒷 면지에는 모래사장 위로 조개, 소라, 불가사리가 어지럽게 널려있다. 이렇게 앞뒤가 다르게 된 과정이 이 그림책의 이야기다.
표지를 다 보고 책장을 넘기면 엄마와 함께 바닷가에 온 아이가 모래 사장 위를 뛰어가는 속지가 나온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에는 아이와 갈매기만 나온다. 엄마 손을 놓고 달려와 파도 앞에 멈춰 선 아이는 파도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손은 뒤로 한 채 몸만 기울인 동작에서 파도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다음 장면에서 아이는 파도가 우르르 몰려오자 몸을 돌려 피한다. 아이 뒤에 있던 갈매기들도 아이를 따라 행동한다. 다시 밀려나는 파도를 보고 아이는 까치발까지 세우고 공룡처럼 자세를 취해본다. 마치 자신 때문에 파도가 밀려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왼편 흑백의 세계와 오른편 파도의 푸른 세계가 책 제본선을 기준으로 나뉘어져 있는 가운데 아이는 파도가 왼편으로 넘어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이제 주저앉아 바라본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손을 쑥 내밀어 본다. 조금씩 조금씩 오른편으로 이동하던 아이는 이제 오른편으로 완전히 진출해 첨벙첨벙 물장난을 한다. 갈매기들도 함께 어우러지고, 한껏 팔다리를 흔들면서 놀던 아이는 자기 키 보다 높아진 파도를 만나자 정지화면이 된다.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달려오는 파도를 피해 왼편으로 달아나는 아이, 왼편에 다다르자 파도에게 혀를 내보이면 자신만만해 한다. 넌 여기에 오지 못할 거라는 듯이.
그러나 파도는 아이를 덮치고 이제 왼편과 오른편 모두를 적셨다. 이제 흑백과 푸른색으로 나뉘던 세계가 모두 푸른색으로 젖어 하나를 이루었다. 하늘도 파랗게 물들고, 아이 원피스도 파랗게 물들었다. 파도에 흠뻑 젖은 아이는 놀라거나 화내지 않는다. 파도가 가져다 준 모래 위의 조개, 불가사리, 소라를 보고 기뻐한다. 엄마와 함께 파도에게 인사하며 가는 아이가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있다. 겉싸개 뒤표지에 치마 가득 담겨 있는 조개, 불가사리, 소라를 담은 아이 모습과 연결된다.
그림책 <파도야 놀자>는 책의 형태와 단순한 색을 이용해 아이들 마음을 잘 나타냈다. 양면으로 분절 시키는 제본선을 이용해 양쪽의 세계를 그렸다. 아이가 있는 왼편 흑백 세계와 오른편 파도의 푸른색 세계는 처음에 나뉘어 있었다. 아이가 용기를 내어 오른편으로 이동하고 파도가 다시 왼편으로 이동하면서 이제 두 세계는 하나로 통합된다.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이 둘이 하나가 되는 성장의 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특히 이 그림책은 가로로 긴 판형이다. 바다의 수평선을 나타내기에 좋다.
영덕 바닷가에서 처음 파도 놀이를 한 아이와 집에 돌아와 이 책을 보았다. 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아이 눈이 빛났다. 나도 파도에 대해 좀 안다는 눈빛이다. 책장을 넘기자 자신과 비슷한 여자 아이가 있다. 파도를 보고 멈칫하는 여자 아이는 아빠에게 안겨 내려오기를 거부하던 자신과 닮았다.
왼편으로 도망가는 여자 아이는 아빠와 함께 만든 모래 구덩이로 달아나던 자신이다. '여기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아빠의 말을 믿고 파도와 바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은 뒤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던 아이의 경험이 그림책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여자 아이가 왼편으로 도망가 혀를 내미는 장면에서 책장을 넘기기 전 "파도가 어떻게 됐을 것 같냐"고 물었다.
아이는 "파도가 넘어 왔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파도에 흠뻑 젖고 싶은 아이 마음이 느껴졌다. 파도에 젖고 난 뒤에도 신나하는 여자 아이는, 파도가 무너뜨리고 간 안전지대 모래 구덩이를 다시 만들었던 일을 떠오르게 한다. 아이는 모래 위에 널브러진 조개, 소라, 불가사리를 보고 파도가 선물을 주고 간 거라 했다. 자기와 같이 놀던 파도는 왜 이런 걸 안 줬냐고 투덜대면서.
아이가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는 데 있어서 자발성과 든든한 지원자 이 두 가지가 중요하다. 누군가 권해서 하는 게 아닌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탐험에 나서야 하고, 돌아와 쉴 곳이 있어야 한다. 부모는 안전지대를 만들어 놓고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된다. 아이들은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스스로 이겨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파도야 놀자 (예스 특별판)
이수지 지음,
비룡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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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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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랑 놀던 파도는 이런 선물을 안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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