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의 파랑새> 책표지.
컵앤캡
그는 1888년에 삭주(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당시 극히 적은 사람들의 혜택이었던 고등교육을 받았다. 제1차 일본관비유학생 시험(1911년)에 합격해 일본으로 유학하는 혜택까지 누렸는데, 조국으로 돌아와서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던 교사의 삶을 살았다. 말하자면 일본 덕분에 대다수 조선인들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경술국치(1910년)에 그는 23세의 청년이었다. 그 무렵 일본 유학을 했다. 그것도 관비 유학생으로. 그는 일본 유학 경험으로 일본말은 기본, 일본인들조차 기가 눌릴 정도로 일본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을 향한 긍정적인 관심도 많았고, 일본인들과의 교류도 자연스러웠으며 빈번했을 것은 당연했다.
우리나라 1세대 조류학자이자 북한을 대표하는 생물학자인 원홍구 선생에 대한 간략이다. 여기까지 읽으며 '친일파' 또는' 매국노'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시대가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거나,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와 같은 구차한 변명으로 자신의 친일이나 매국을 면죄 받으려했던 사람들의 환경이나 조건과도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홍구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친일' 혹은 '매국'이란 단어와 함께 발견되는 글은 없다. 그보다 조류학자(또는 북한의 조류학자), 생물학자. 원병오 부친. 찌르레기 등과 같은 단어(이름)들과 함께 그의 생애나 업적에 대해 설명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비록 사전적인, 그래서 거기서 거기, 비슷한 설명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그것도 일본인 교사들 속에 끼인 조선인 교사로서 어느 정도는 일본의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없는 것은 그가 당시 방치되었던 이 땅의 동식물들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 곧은 지식인이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원홍구 선생이 한창 이상을 펼치던 1920~1940년대, '아무나 갖는 게 임자'식으로 조선의 유물들이나 동식물 등이 방치, 서양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이 땅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일부 동식물들은 일본인들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이거나 해석되고 있었다. 어떤 동식물들이 이 땅에 살아가고 있고 어떤 유물들이 있는지, 그 실태조차 명확하지 않은 때였다. 관련 학문 기초조차 없던, 아니 필요성조차 느끼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 때였다.
이런 시기, 선생은 이 땅의 식물들과 조류 등과 그 생태에 뜻을 두고 연구, 그 기초를 만들었다. 선생이 당시 붙인 이름 그대로 불리는 것들이 많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접하는 여러 동식물 이름에는 식민지 백성으로 외로운 길을 걸었던 원홍구 선생의 소명과 열정이 스미어 있는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은 1970년. 한국전쟁 이후에도 북한의 독보적인 생물학자로 관련 많은 업적이 있다. 북한의 조류와 포유류와 파충류 관련 몇 권의 책과 수많은 논문들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일제강점기에 이어 구축한 자료들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과 러시아 등 아시아의 생물들과 생태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중요한 역할은 휴전 이후 폐쇄된 북한의 생물들을 연구 기록함으로써 그 생태를 알린 것. 그리고 마땅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한 것. 학자인 동시에 자연보호주의자였던 그에 의해 북한의 많은 지역들이 국가적 자연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고, 그가 요청한 여러 종의 조류나 포유류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많은 제자들을 배출, 한국동란 전후 활동한 인사들도 많다는데, 그가 배출한 학자 중 가장 유명한 이름들은 석주명과 원병오. 그리고 정준택(북한)이다. 그중 우리나라 조류학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존재인 원병오 박사는 선생의 막내아들로, 선생이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이던 1929년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