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없이 뚝 끊는 광고 전화.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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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던 작가의 반가운 근황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 일단은 받는다. 그중 절반은 통신사나 카드사에서 걸려온 전화다. 낯선 사람에게 전화해서 뭔가를 제안하고 수도 없이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한 친절하게 대답한다.
예전에는 아무리 '괜찮습니다', '감사하지만 필요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해도 끈질기게 전화를 끊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한 번만 거절하면 대부분 금방 전화가 마무리된다. 문제는 내 쪽에서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해도 그쪽에서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경우다.
- 안녕하세요, 고객님. 이번에 저희 OO에서 이런 상품이 나왔는데요~
"아, 죄송해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 뚝. 필요하다고 한 적도 없는 상품을 소개하려고 멋대로 전화를 걸어 놓고, 사양하면 말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냥 '네'라고 한마디 대꾸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물론 그들도 피곤하고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걸 마음 넓게 이해해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 <매일이, 여행>에도 간혹 점원이나 택배 기사의 불친절함에 마음이 상했다는 경험담이 나온다. 그걸 보면서 나는 내심 안도했다. 음울한 마음마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응당한 감정처럼 세심하게 그려내는, 그 섬세하고 감성적인 작가도 일상의 불친절함에는 기분이 나빠지는구나. 그녀도 나와 다를 바 없이 불쾌함과 짜증을 느끼고, 비합리적인 일에 대한 답답함을 겪는, 같은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이구나.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세이를 읽다 보니 새삼 그런 친숙한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으면 그 작가를 사람으로서 좀 더 가까이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게 좋을 때도 있고, 물론 가끔은 별로일 때도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아마 20대 초반 무렵에,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의 또래 친구들은 누구나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일본 소설에 꽤 빠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지만, 그 내면에 있는 또렷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더듬는 감성의 흐름은 내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그런 예민한 감성의 세계는 완전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래도 10여 년 넘게 친숙하게 생각해온 작가이기 때문인지 마치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낸 이웃 혹은 예전에 아주 좋아하던 배우의 근황을 듣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녀의 신작 에세이를 반갑게 펼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