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일 오전 서울 서초구 한샘 본사 주변이 적막한 모습이다.
연합뉴스
이른바 '한샘 사건'이라 불리는 연쇄적인 직장 내 성폭력 사건이 '성폭력'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였다. 사건이 폭로된 것은 지난 10월 말이었으나, 사건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19일 오후 4시 경 발행된 <뉴시스> 기사 '한샘 피해 여성은 왜 성폭행 이후 'ㅎㅎ' 카톡을 보냈나'(
링크)는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3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러한 논쟁이 한국 사회에서 하루이틀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가 없다. 왜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만 바뀐 듯한 성폭력 사건들이 자꾸 발생하고, 비슷한 반응이 일어날까?
한 가지는 확실히 짚어 두고 가자. 모든 성폭력 사건의 세세한 진상을 밝히는 일은 제3자들의 몫이 아니다. 제3자가 목격하기 어려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성폭력은 그만큼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는 것은 피·가해자 소속집단 내의 조사위원회, 피고소인과 고소인의 변호사, 검찰이 할 일이다. 대신, 제3자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다른 데에 있다. 이 기사 밑에 달린 네 가지 댓글 유형을 통해 문제를 짚어보자.
[하나] "이상하다. 강간당한 여자가 보낼 메시지는 아닌 것 같다"가장 전형적인 반응이다. 현재 뉴시스 기사('한샘 피해 여성은 왜 성폭행 이후 'ㅎㅎ' 카톡을 보냈나', 19일 16:03 발행)의 포털 '다음' 베스트 댓글이다. '공감' 버튼이 6520개 눌렸다(20일 자정 기준).
우리 사회는 '강간 피해자'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할까?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인 조한혜정의 제자 나윤경은 조 교수의 정년 기념 문집에서 1980년대에 조 교수가 "성폭행 당했다고 울고불고할 거 뭐 있나.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면 되지. 통념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여기엔 많은 가정이 생략돼 있다. 피해자가 이렇게 할 수 있으려면, 모두가 성폭력 피해자를 추가적으로 괴롭게 하는 그 '통념'에 맞서 싸워야 한다.
통념적이고 전형적인 '강간' 피해자란 무엇일까? '강간당한 것은 곧 순결을 잃는 것', '연애와 혼인 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진 여자가 되는 것'이라는 시대착오적인 통념이 완전히 없어진 사회라면 강간 피해자는 지금만큼 고통스러워 할까? 그리고, 그런 '전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만이 '진짜' 강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는,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지갑을 도둑맞은 절도 범죄의 피해자는 피해 사실로 인해 기분이 나쁠지언정 다른 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즉, 강간을 비롯한 성폭력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게 만드는 건 강간 당한 여자를 보는 시선이다. 피해자가 주눅 들고, 슬프고, 끔찍하게 괴로운 상태에 휩싸여야만 피해를 봤다고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문제다. "강간당한 여자라면 저렇게 행동하지 않을 텐데" 같은 말을 보태는 제3자들이 바로 피해를 더 많이, 더 크게 만들어낸다.
[둘] "소수의 미친놈들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성폭력은 '소수의 미친놈'들이 저지르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첫 번째, 전형적인 강간 이미지를 벗어난 성폭력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다. 두 번째, 전형적인 강간 이미지를 벗어난 성폭력을 당하고 나서, 그것이 성폭력인지를 바로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성폭력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라는 것이 현재 대부분 대학과 기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반성폭력 교육의 뼈대이고 중론이다. 그런데도 성폭력 피해는 다양하게 조망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주는 언론, 방송, 출판물 등은 가장 자극적으로 소비될 만한 성폭력 피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인생이 망가져버린' 여성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퍼트린다. 미디어는 가해자의 이름이 아니라 피해자의 이름으로 성폭력 사건을 명명한다. 사건의 세부사항과 피해자 연령, 직업 같은 정보를 상세히 나열한다. 이런 관점에 익숙해진 '보통 사람들'은 가장 끔찍한 수준의 강간 사건과 피해자의 이미지가 곧 '성폭력'과 '성폭력 피해자'라고 여기게 된다.
'소수의 미친놈'만 성폭력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더 다양한 범위의 성폭력도 성폭력임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피해자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실제로 성폭력 피해는 대부분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난다. 직장상사, 동료, 거래처, 친/의부, 형제/자매, 친인척, 선/후배, 데이트 상대, 이웃, 교/강사 등 '아는 사람'이 성폭력을 저지르는 비율이 90%를 넘어간다(2013년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이러한 사실은 더 잘 알려져야 한다. 그래야 피해 상황에서 내적 갈등이 줄어들고, 더욱 빠르고 단호한 대처가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