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말'을 가다듬는 이야기만 그러모았는데 790쪽이 넘는 두툼한 글쓰기 사전이 태어났습니다.
철수와영희
우리는 왜 겹말을 쓸까요? 첫째로는 말이나 글을 쉽게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쉽게 하면 될 말이나 글에 자꾸 뭔가 덧붙이려 하면서 겹말이 되고 맙니다. 뭔가 붙이거나 꾸며야 그럴듯해 보인다거나 뜻이 또렷하다고 잘못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큰 책이면 "큰 책"이라 하면 됩니다. 빠르게 달리면 "빠르게 달린다"라 하면 됩니다. "큰 형태의 책"이나 "빠른 속도로 달린다"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음으로 한국 사회는 '겹말 굴레'에 갇혔습니다. 겹말 굴레란, 쉽거나 수수하거나 또렷한 말로 생각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얽매이거나 꼬인 굴레라 할 만합니다. 우리한테는 한국말이라는 텃말이 있습니다만, 예부터 권력자하고 지식인은 중국 한문을 높이 여겼습니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아버지'는 낮춤말로 삼고 '모친·부친'은 높임말로 삼고 말지요. 여기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말만 써야 한 서른 몇 해를 보냈고, 일본 한자말이 신문이나 책이나 방송을 거쳐 어마어마하게 밀려들었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다가 대학 학문까지 죄다 일본 한자말로 범벅이 되었지요.
그리고 한국 사회는 조선 봉건 부스러기하고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털 겨를이 없었어요. 해방 뒤로는 독재와 새마을운동과 경제성장이라는 채찍질에 시달리면서 말을 말답게 건사하거나 글을 글답게 갈무리하는 살림을 못 지었어요. 이러면서 눈부신 인터넷 나라로 달라지는 동안 한국말은 '의사소통 도구'로조차 구실을 못할 만큼 나뒹굽니다.
고장말을 스스로 잊으면서 불거진 겹말책의 작가·책의 작자·책의 저자·책의 필자 → 지은이·글쓴이·책쓴이불거지거나 늘어나는 겹말을 걷잡지 못하는 까닭을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스스로 새로운 낱말을 지어서 살찌우겠다는 생각을 못하기 일쑤입니다. 맞춤법하고 띄어쓰기하고 표준말이라는 데에 너무 얽매이지요. 서로 생각을 즐거이 나누도록 돕는 말법이 아닌, 틀에 맞추지 못하면 '틀렸어!'나 '잘못이야!' 같은 손가락질을 하는 말굴레가 억누르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고장말(사투리·텃말·마을말·시골말)은 문학에서도 버림을 받고, 책이나 교과서나 방송에서는 더더욱 못 나옵니다. 고장마다 말이 달라 '어머니'라는 표준말이 아닌 '어무이·오마니·어매·오마이·어마이·엄매·엄메·움마' 같은 고장말을 쓰지만 정작 이러한 여러 고장말은 차츰 설자리를 잃습니다. 한국말에는 '진지'나 '여쭈다'나 '계시다'처럼 꼴이 아예 다른 높임말이 더러 있으나, 자리나 말씨에 따라서 여느 말도 모두 높이는 느낌을 나타내요. '어머니·어무이……'만으로도 얼마든지 높이는 말을 나눌 수 있어요. 토씨에 따라서도 높이고요. 이러한 말결을 제대로 못 가르치면 "저희 어머니 아무개 모친은" 같은 겹말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새로 나온 최신곡"이 아닌 '새노래'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바꾸고 교환하"지 말고 그냥 '바꾸'면 좋겠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 아닌 '옛이야기'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놀랍고 충격적"이라 여기지 말고 '놀랍게' 여기면 좋겠어요. "반질반질 광이 나"게 안 닦아도 좋으니 '반질반질' 닦으면 좋겠어요. "딱 잘라 거절하"지 말고 그냥 '딱 자르'면 돼요.
학교나 사회는 '석차순'으로 사람을 가르곤 하는데 '석차'나 '성적순'으로는 이제 그만 가르면 좋겠어요. "작은 사이즈"인 옷을 입겠다며 "다이어트로 살을 빼"는 일을 굳이 안 해도 되지요. '작은' 옷도 좋고, '살빼기'를 안 해도 좋아요. "늦게 핀 대기만성"이 아닌 '늦게 핀' 꽃이거나 '늦꽃'일 뿐이에요.
곱게 말꽃을 피우면서 어린이 눈높이를 헤아리며 쉽게 말하려고 하면 겹말은 말끔히 사라져요. 투박한 시골말을 쓰거나 수수한 고장말을 사랑할 적에도 겹말은 눈녹듯이 사라져요. '오밤중'도 '야밤'도 아닌 '한밤'에 별잔치를 보며 생각합니다. 겹말이나 군말에서 거품을 빼면서 홀가분하게 피어날 이야기꽃을 그립니다.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최종규 지음, 숲노래 기획,
철수와영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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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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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최신곡"... 우리는 왜 겹말을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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