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섭진과 박청자전 용화지서장 이섭진과 그의 아내 이청자
박만순
이섭진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전쟁이 나서 군인과 경찰들이 후퇴하기 바쁜 상황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왜 소집했을까? 특히 이 일에 경찰서 사찰과와 CIC(특무대)가 나선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을 곱씹어 봐도 이들을 후방으로 격리시키기 위한 조치는 아닌 것 같았다.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다가, 부인에게 상의한 것이다. 부인 이청자는 "당신이 죽더라도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야 해요"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는 계엄령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와 특무대의 지시를 거부하고 보도연맹원을 살려 준다는 것은 목숨을 내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는 당시 영동경찰서에 근무했던 정시래와 권혁수도 증언한 사실이다.
정시래 증언에 의하면, 영동경찰서장 김경술이 평소 가까웠던 애기사(愛機社) 사장 노병도가 예비 검속되어 경찰서에 끌려오자 석방시켜 주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무대 영동분견대장이 권총을 들이대며 "죽고 싶냐"고 협박해, 그 자리에서 달아나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고 한다. 정시래는 이 증언을 하며 이섭진 지서장도 당시 목숨 걸고 그 행동을 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충북 괴산군 증평면(현재는 증평군) 증평지서장 안길룡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다. 안길룡 지서장은 괴산경찰서의 지시를 받고 보도연맹원을 소집했다. 그중 일부를 풀어 주었는데, 헌병대에서 와 "네가 뭔데 보도연맹원을 풀어 주었냐?"며, 근처로 끌고 가 권총으로 총살시켰다. 증평지서장 사례 증언은 충북도경 경무과 보안과에 근무했던 윤태훈(6.25 당시 27세)씨의 증언에 기초한다.
면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쌀과 돈을 모아 공덕비 세워
이런 상황에서 이섭진 지서장은 자신이 죽더라도 보도연맹원들을 살려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당시 보도연맹원들은 대부분 순박한 농민들이었고, 과거 남로당에 활동했던 사람들도 모두 전향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서와 영동경찰서가 수시로 주최한 반공교육과 각종 행사에도 순순히 응했었다.
결국, 지서 유치장 마당에 집결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섭진 지서장이 "소집이 끝났으니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라는 말에, 죽음의 땅에서 벗어난 줄도 몰랐던 것이다.
이섭진 지서장 환영대회가 끝난 후 용화면 유지들은 공덕비를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공덕비는 보도연맹원 40명을 살려 준 것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공덕비 설립 취지는 이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지서장은 용화지서장 근무 시에 면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주민들의 애환과 고충을 항상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유지들은 마을을 다니며 주민들에게 쌀 한 되씩을 모았다. 보도연맹원이면서 살아난 사람은 물론이고, 일반 주민들도 흔쾌히 참여했다. 보도연맹원으로 당시에 살아난 강학철(전쟁 당시 21세. 2015년 작고)도 쌀 한 되를 보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