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가즈오 이시구로에 수상의 영광을 안겨다준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은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소설이다. 국내에서는 '현대의 고전'을 출판한다는 목적 아래에 간행되고 있는 민음사의 '모던 클래식' 세트의 일환으로 근래에 새로 간행된 바 있다.
이 책의 원본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1989년 초본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출판 첫 해에 부커상을 수상하였고, 4년 뒤에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기까지 했을 만큼 이 작품에 대한 세간의 주목은 상당했다.
그러나 현대의, 그것도 한국의 독자가 읽기에 <남아 있는 나날>의 내용은 그 명성에 비해 시시하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학은 자극적인 소재나 서사구조를 채택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도리어 그 정반대의 길, 담담하고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서술자가 조곤조곤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 역시 초반부에는 빠르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영국의 한 고급 저택에서 살아온 노년의 '집사'가 들려주는 '품위'나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 따위의 논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책 읽기에 익숙지 않은 이들이라면 낯선 소재와 지리한 전개로 지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가 드러나며 <남아 있는 나날>이 주목받은 이유를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자신이 평생 존경하며 섬겨온 주인이, 자신의 삶의 자부심의 주축이 되어온 바로 그 인물이 실은 한낱 무능하게 이용된 '나치 부역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과정, 그것이 이 책의 주인공이 서서히 깨닫게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인식의 과정이 이 작품의 소재이다.
작가는 <남아 있는 나날>을 통해서 30년대 영국의 역사 속 어두운 면을 끌어내고, 동시에 시간이 많이 흐른 상황(노년의 주인공)에서라도 그것을 바로 인식하고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새롭게 바뀐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남아 있는 나날>을 감성적인 필체로 그려낸 역사소설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이 작품 뿐 아니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가즈오 이시구로는 보다 확실하게 동일한 소재를 다룬 바 있다. 이 작품은 제국주의 일본에 부역했던 화가의 반성적 회고담을 다룬다. 이처럼 그의 글들은 늘 섬세하고 은은하나,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그 어느 작가의 것보다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과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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