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화해위원회에서의 증언딩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하는 김만식
박만순
'진실화해위원회'에서도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김만식씨의 증언이 시급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07 유해 발굴 중간보고회'가 있던 2007년 11월 13일 김만식의 공개증언이 다시 열렸다. 2007년 충북 청원군을 포함해 전국에서 발굴된 유해가 진실화해위원회 대회의실에 전시되었다. 유해를 본 김만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료들로부터는 원망을 받았지만..."원주에서 확인사살을 하는 데, 권총으로 머리를 쏘니까 피가 튀어 내 옷을 흠뻑 적셨어요.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중략) 과정이야 어떻든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57년 전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인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합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충북도청에서의 증언보다 진심어린 고백과 사죄가 눈에 띄었다.
두 번의 기자회견이 김만식씨에게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과거 6사단 헌병대 동료들을 포함한 군(軍) 동지들에게 좋지 못한 소리와 원망의 눈초리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했다. 수십 년 동안 꿈자리를 사납게 했던 '학살 장면'이 기자회견 이후 없어졌기 때문이다. 60년 가까이 시달려 온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김만식씨가 왜 군에 입대해, 이런 끔직한 경험을 하게 되었을까?
도끼로 머리를 맞아 죽은 아버지'북청물장수'로 유명한 북청 읍내는 해방 후 시끌벅적했다. 이날도 읍사무소 앞에는 수 백 명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인민재판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친일파 김봉철은 일제강점기에 목재상을 하면서 인민의 피를 빨아 부를 축적했소, 인민의 적 김봉철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사형(死刑)을 내리시오"라고 군중들이 외쳤다.
잠시 후 재판장은 사형을 선고했고, 즉석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집행인은 칼이나 총을 든 것이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김봉철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하늘을 날던 도끼는 김봉철의 머리에 내지 꽂혔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19세 청년 김만식은 아버지의 죽음을 그렇게 맞았다. 1927년 북청군에서 출생한 김만식은 성동심상소학교와 북청중학교를 거쳐 흥남공업대학을 다녔다. 일제강점기에 엘리트코스를 밟은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해방과 동시에 나락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 때문에 그가 북한에서 설자리는 넓지 않았다. 그는 금덩이를 품 안에 숨기고 3.8선을 내려왔다. 가옥을 빼앗기기는 했지만, 일부 부동산이 남아 있어 금으로 바꾼 것이다.
누나 세 명은 나이가 많기도 했지만 고향에 부동산이 남아 있어 마을에 남기로 했다. 그가 갖고 온 금덩이는 주택을 구입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백수생활이 지속되면서 구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물론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버지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물론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6사단 헌병대에 몸을 담았고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그는 전쟁 초기에 상부의 명령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헌병은 그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차라리 보병으로 전선에 투입되어 싸우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다. 1950년 7월 27일 다부동전투에 '육탄결사대' 소대장으로 참전한 것이다. 24명의 결사대원은 인민군 전차 12대를 주저앉혔고, 이는 그 공으로 '금성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훈장은 헌병대가 창설된 이래 2007년까지 헌병대에서 그만 유일하게 받은 것이다.
그는 1956년 육군 대위로 예편해, '무공수훈자회 충북지부장'과 '재향군인회 충청북도 이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전쟁 영웅 김만식에게는 '보도연맹원 학살'이라는 트라우마가 항상 있었다.
김만식의 공개증언 이후 아쉽게도 제2의 김만식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한국전쟁기에 상부의 명령으로 집단학살에 가해자로 참여했고, 이를 반성한다는 공개증언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민간인 학살의 가장 큰 책임은 이승만을 포함한 최고 권력층에 있다.
하지만 총살현장 책임자도 그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다. 김만식씨 처럼 용기 있는 고백과 사죄로 역사의 사면장(赦免狀)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사면장은 차치하고라도 68년간을 옥죄어 온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5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공유하기
한 노병의 참회 "죽기 전에 고백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