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 도쿄의 거리에서>의 저자 가토 나오키 선생님과 만나다

조선인 학살의 거리를 다시 거닐며

등록 2018.03.26 10:30수정 2018.03.2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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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 도쿄의 거리에서>의 저자 가토 나오키 선생님과 만나다.

선생님과는 저자와 독자로 처음 만났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조선인 학살을 기록한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사서 읽었다.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는 단숨에 읽혔다. 학살 장소에 내가 서있는 듯한 흡입력과 표현이 대단했다.

1년 정도 시간이 지나,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 2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자문을 구하기 위하여 역사문제연구소의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과 통화를 했다. '가토 나오키 선생님을 직접 만나보는 건 어떻냐.'고 말씀해주셨다. 책을 낸 출판사와 연결을 통해 가토 나오키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2018년 2월 7일 오전 10시에 뵙기로 했다. 장소는 료고쿠역이었다. 역에서 몇 분 걸어가자 요코아미초(横網町) 공원이 나왔다. 관동대지진 당시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약 3만여 명이 피난해있었는데, 화재가 발생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망했다고 말씀하셨다.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이 방화를 저지르고, 우물에 독을 탄다는 소문이었다. 공원에는 도쿄부흥기념관(東京都復興記念館)이라는 전시관이 있었다. 전시관의 절반은 관동대지진 당시의 모습을, 나머지 절반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도쿄 대공습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전시관에 학살의 기억들을 전시하는 것이 21세기에 들어와서 가능했다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더 이상 퍼트리지 말라는 경시청(한국의 경찰청)의 삐라가 걸려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을 학살한 주역인 자경단의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역시 다른 전시에 비해서 비중이 적었다.

중국의 불교 단체가 일본의 관동대지진의 피해를 안타까워하며 위로 차원에서 보낸 물품도 전시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인에게 우호적이진 않았지만 관동대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자, 중국 내에서 일본인들을 돕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일본을 줄곧 비판하던 한 신문사가 거액을 모금하기도 했다.

한편, 학살은 중국인들을 향해서 발생하기도 했다. 600여 명의 중국인들이 조선인으로 몰려서 학살당했다. 중국복장을 입고 중국말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참혹한 학살의 현장에서 생존한 중국인이 일본으로 돌아가서 그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알렸다. 그는 상해의 후유증으로 몇 해가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중국인들은 분노했다. 중국의 국내 정치 문제로 결국 흐지부지 되긴 했지만 외교문제로 비화되어서 협상까지 진행됐다.


선생님은 중국인 학살의 몇 배가 죽은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정부 차원에서 중국인 학살과 달리 어떤 협상도, 해결도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조선은 외교권이 없는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9월 도쿄의 거리에서 구타당하여 중상을 입은 조선인에게 조선총독부가 일본에서의 일은 잊어버리라고 경고하는 일도 있었다. 수많은 죽음들은 그렇게 묻혔다.

어린 아이들이 자경단 놀이를 하는 그림도 걸려있었다. 아이들이 긴 막대기를 들고 조선인을 학살한 자경단을 흉내내는 그림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다. 얼마나 학살이 빈번했으면 아이들의 놀이로 까지 나타났을까. 4.3당시 제주에서 아이들이 학살현장에 널부러져 있던 화약을 가지고 놀이를 하곤 했다. 학살과 관련된 놀이들이었다. 화약을 모아서 터트리기도 했다. 4.3 공부하며 봤던 모습들을 일본에서 또 보게 되었다. 다리가 그려진 그림이 있었다. 당시 다리에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는데 다리가 불에 타면서 피난민들과 함께 침몰해버렸다. 군인이 조선인을 학살할 때 다리 주변에 시체를 버리곤 했다고 설명하셨다. 이미 무수한 시체들이 떠올라서 구분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후반부의 그림들은 황태자, 황후 등이 영웅처럼 등장해서 관동대지진 복구를 돕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그림이었다. 조선인 학살에 대한 가해에 대한 그림들보다 그림의 크기는 훨씬 컸고 그림의 수도 많았다.

전시관을 나온 후에는 공원에 있는 조선인 학살 추도비에 갔다. 추도비는 조선인들을 추도하는 것으로 1970년대가 되어서야 세워졌다. 관례처럼 도쿄의 도지사들이 매년 추도문을 보내곤 했는데 최근 도쿄 도지사가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추도문을 더 이상 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하셨다. 재특회는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인들은 실제로 방화를 일삼았고, 실제로 우물에 독을 탔었다는 것이다. 그런 불령선인을 때려잡는 게 어떻게 학살이 되냐는 논리다. 당시 일본의 경시청도 유언비어라고 인정한 소문을 아직도 믿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을 진행하면서 기획과 통역을 맡았다. 이 이야기도 통역을 해야 하는데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말을 이을 수가 없자, 가토 나오키 선생님께서 한국말로 도와주셨다. 아아, 학살의 잔향은 재특회의 입을 빌어 아직도 도쿄에 남아있었다.

추도문에는 조선인들이 생명을 빼앗겼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누가 빼앗았는지, 어떻게 빼앗겼는지, 책임 주체, 가해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은 당시 추도문은 혁신파부터 보수파까지 함께 참여해서 만들었기에 비문의 내용이 애매해져버렸다고 설명하셨다. 수천 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했지만 1970년대에 도쿄에 겨우 하나의 추도문이 만들어졌다. 거기다 비문에서 피해, 가해 사실은 지워져있었다.

전시관과 근처 공원을 나와서 구야스다 정원(旧安田庭園)으로 갔다. 일본의 4대 재벌 중 하나인 야스다 재벌의 소유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은 참혹한 역사를 껴안고 있다. 조선인 두 명이 바로 정원 입구에서 불에 타 죽임을 당했다.

구야스다 정원(?安田庭園) 입구 이 장소에서 조선인 두 명이 불에 타서 학살당했다.
구야스다 정원(?安田庭園) 입구이 장소에서 조선인 두 명이 불에 타서 학살당했다.오민석

정원을 지나,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운하를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던 장소로 왔다. 다리의 이름은 미쿠라바시(御蔵橋)이다. 사진을 하나 보여주셨는데 그 사진에는 조선인들의 시체가 유기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충격적이었다.

역으로 돌아오자 가토 나오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

"지금도 조선인학살에 대해서 기억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잊어버리면 언제든 다시 학살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조선인을 멸칭하던 불령선인이라는 단어, 조선인을 죽이라는 구호가 학살 90년을 넘어서 2013년에 헤이트 스피치라는 이름으로 다시금 도쿄의 거리에서 울리곤 했습니다. 우리는 인종, 민족으로 사람을 객체, 비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저항해야 합니다. 비록 아직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메커니즘은 강합니다. 하지만 연대하고 함께하면서 그것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조선인 학살을 말하고 분노하는 일본인들 역시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후 일정은 아사쿠사에 가는 것이었는데 아사쿠사 근처에 있었던 학살에 대해서 정리된 자료를 넘겨주셨다. 아사쿠사는 도쿄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몇 번이고 찾았다. 그곳에도 참혹한 학살이 존재했다.

한편, 아무것도 없이 그저 메일로 안내를 부탁드린 것이었기에 500엔씩 모아서 작지만 강연료를 드리기로 했다. 정말 좋은 시간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그 돈을 받으신 선생님은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에 후원하신다면서 돌려주셨다. 자기 돈이니까 자기가 쓸 수 있다고 하시면서. 돌려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무 멋있었다. 존경하는 마음이 한 층 더 커졌다.

조선인 학살의 현장을 거니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토 선생님과 함께 다닐 수 있었다. 책과 현장의 무게는 달랐다. 6명의 일본 친구, 5명의 한국 친구들과 함께 느끼고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내가 일본을 오가고 공부와 교류를 이어가면서 변화했듯이 친구들도 조금씩 변화해갔음을 알 수 있었다.

가토 나오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인간화 메커니즘은 정말 강력하다. 민족, 인종, 성별, 장애유무, 섹슈얼리티, 계급으로 사람들은 하나의 속성으로 환원되고, 또 분리된다. 실존성은 박탈당한다. 국가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통해 사람을 국민으로 호명하면서 끊임없이 객체로 만든다. 국민의 탄생은 비국민의 탄생과 같다. 국민은 비국민의 존재로 증명된다. 경계는 굳건해진다. 그리고 국민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비국민을 공격해야 한다.

'나'는 끊임없이 내가 조선인이 아님을, 소수자가 아님을 역설해야 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멸시도 그렇게 이뤄진다. 여성을 교환하고 성적 대상으로 만들면서 '그'는 남성연대(homosocial)에서 남성으로 인정받게 된다. 조선인 학살은 일부 일본인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혐오도 일부 남성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문제이고, 남성연대 전체의 문제이다. 구조의 문제이다.

한 사람은 어떤 민족이나 성별이라는 구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훨씬 복잡한 존재다. 저항은 인간 존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복잡성을 폭력적으로 단순화시키는, 다시 말해 비인간화시키는 사회구조와의 싸움이다. 이는 경계를 허물면서 이뤄질 수 있다. 11명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서 마주한 것처럼.

이번 기회는 11명의 사람들이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 사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경험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는 동료가 되었다. 이런 기회를 주신 가토 나오키 선생님께 정말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가토 나오키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한일청년평화인권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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