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밖에 없어서 씁니다, 시란 그런 존재"

[인터뷰] 시집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 출간한 정재훈

등록 2018.06.16 14:18수정 2018.06.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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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이자 이 글을 쓴 박정우 시민기자는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을 펴낸 '우드스톡'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편집자말]
운명이 불렀다 하여 따라가면
아니 슬플까

굳은 눈매로 미소 지은 초상 앞
똑바로 직시하는 눈 하나 없다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는 꽃 잎> - 운명 중에서


첫 시집을 출간한 신인 작가 정재훈은 국가대표 양궁 선수였다. 슬럼프로 은퇴한 뒤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고, 일 년 만에 등단했다. 넓디넓은 공간에서 좁은 한 점을 맞추어야 하는 양궁과 무수히 많은 단어의 조각들 가운데 어떤 정수만을 골라 하나로 꿰어야 하는 시를 쓰는 것은 다른 듯 닮았다.


순수를 잃어버린 시대에 순백의 시어로 사랑을 말하고, 고독의 세계를 헤쳐나간다. 그는 지금 밥벌이를 위해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시를 쓴다. 합정동의 카페에서 정재훈 시인을 만났다.

정재훈 정재훈 프로필 사진
정재훈정재훈 프로필 사진박정우

- 국가대표 양궁 선수 출신이라는 이력이 흥미로운데, 어떻게 양궁과 접하게 되었는지?
"초등학교 6학년 때 교실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어요. 제가 또래보다 체격이 크고, 팔이 긴 편이었는데, 그 모습을 본 당시 양궁부 감독님의 스카우트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죠. 사실 양궁에 크게 흥미도 없었고 좋아하지도 않았어요. 운동부가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선배들한테 많이 당하기도 했고요."

- 그런데도 계속 한 이유는?
"우선 부모님도 운동선수 출신이라 좋아하기도 했고, 제가 뭘 꾸준히 한 게 없었거든요. 그래서 이거라도 하는데 까지 해보자 라는 마음으로 참았어요.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만두어야겠다, 싶었는데 말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누가 그만둔다고 하거나, 무슨 일이 생기거나 뭐 그런 일들이 계속 생기는 거예요. 가뜩이나 소심한 성격인데 그런 일이 있으니 말을 못했죠. 그래서 정말 꾸역꾸역 고등학교까지 하게 됐어요."

- 좋아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양궁선수로서 재능은 있었나? 
"졸업할 때까지 계속 꼴찌만 했는데요...(웃음)"

- 그런데 국가대표는 어떻게 된 건가?
"이 사연이 좀 웃긴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양궁은 리커브보우라고 합니다. 저 또한 리커브 보우로 양궁을 시작했고요. 그런데 성적이 좋지 않아 대학교 입학과 동시에 컴파운드 보우로 전향 했어요. 부모님과 논의 끝에 컴파운드 보우로 전향했는데도, 성적이 계속 안 나오면 운동을 그만두기로 결정했거든요. 신기하게도 그 뒤부터 줄줄이 메달을 따는 거에요.


모든 스포츠가 다 그렇겠지만 양궁도 결국 멘탈이 중요한데, 뭐 성적이 안 나오면 양궁을 그만둘 수 있으니 좋고, 성적이 잘 나오면 메달을 딸 수 있으니 좋다 뭐 이런 마음으로 편하게 쐈더니 쏘는 족족 잘 맞는 거죠.(웃음) 국가대표가 된 것도 운이 좀 따랐는데, 원래 국가대표가 된 선배가 운동을 그만두고 나가버렸어요. 그 당시 대학교 1학년생 중에선 제가 성적이 가장 좋았거든요. 그래서 졸지에 국가대표가 되었고, 8회 세계대학 양궁선수권대회에 출전 하게 되었어요."

대학선수권대회 대학 선수권 대회 당시 사잔
대학선수권대회대학 선수권 대회 당시 사잔박정우

- 그런데 왜 양궁을 그만두게 된 것인가?
"처음 양궁을 시작할 때부터, 목표는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목표를 이루고 나니까 상실감이 몰려왔어요. 아까 말했지만 멘탈이 중요한 스포츠다 보니까 내가 왜 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쏴야하는지에 대해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길을 헤메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니까 또 안 맞기 시작하더라고요, 양궁부 선배들과도 잘 못 어울렸어요. 제가 술을 못 마시니까 놀러 나갈 때도 계속 숙소에만 있고... 그때 책을 많이 읽게 됐어요. 어쨌든 양궁부 있으면 장학금은 나오니까 계속 붙들고 있다가 졸업과 동시에 은퇴하게 된 거죠."  


- 그만두고 나서도 상실감이 상당했을 것 같은데?
내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정말 괴로웠어요. 좋든 싫든 10년을 붙잡고 있었는데 그게 한순간에 사라진 거잖아요. 운동 때문에 어깨고 허리고 다 고장났고, 가진 것은 고작 졸업장뿐. 그 이후에 우울증에 걸려서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무기력증에 빠져있었어요."

메달 선수 생활하면서 딴 메달
메달선수 생활하면서 딴 메달박정우

- 시를 쓰게 된 계기는?
"그렇게 약 5년여 간을 우울증에 빠져 지냈습니다. 뭘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문득, 책상 위에 쓰지 않은 필기구들이 잔뜩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때 당시 제 마음 안에 우울, 불안 이런 것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런 것들은 글로 비워내고, 노트는 채워보자 뭐 이런 결심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글을 쓰다 보니 시의 형태와 많이 비슷해졌고, 그러니까 또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여러 시집을 읽으며 공부하고 쓰게 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감정이 소모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던 우울함을 글로 풀었을 때 그게 해소되는 것 같아요. 그 덕분에 우울증도 나았고, 시집도 내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행복한 일이죠."

슬픔을 소모하여 시를 썼다
그러나 여전히 시가 쓰여지는 이유는
아직도 많은 아픔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는 꽃잎> - 시작 노트 전문


- 결국 본격적으로 시를 쓴지 1년만에 등단하게 되고, 2년 만에 첫 시집이 나왔다. 직접 책 소개를 한다면?
"이 책은 저에게 애증이라는 말로밖에 표현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우울증에 빠져서 괴롭고 아팠던 때를 생각하면서 한 편 씩 쓴 터라 보기 싫다가도 내가 써 내린 자식 같은 아이들인데 하며 펼쳐보게 되는 시집입니다. 이 시집을 내기 전의 제 시는 풍경 위주의 서정적 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허나 사람이 쓰는 시에 사람이 빠져있다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으로 '사람' 그것도 사랑에 관한 시를 쓰게 됐어요.

1부 '사랑 해가 떠올라 이 별이 질 때까지'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짜서 남녀 간의 사랑부터 이별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한 편 한 편의 시 자체의 맛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어떤 스토리 같은 것도 느낄 수 있게 구성했구요, 2부 '꽃은 사라져도 뿌리는 살아있다'는 제가 초기에 쓴 시들 위주인데 제 자신의 아픔과 그리움 같은 것들을 회상하며 쓴 것들이 많습니다."

시집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
시집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박정우

- 시집에 실린 것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는?
"솔직히 다 제가 쓴 것들이라서 제일 좋아하는 시를 꼽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쓰면서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시는 '비탄'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서 얘기한 시여서 그런 것 같아요."

행복을 동경하고
슬픔에 공감하며 산다

희망이 있다 부르짖으며
자조하는 얼굴 밑엔
우울이 죄어 오고 있다

머리끝까지 먹혀 버리면
그제야 어른이 되는 걸까

혁명을 부르짖던 자들은
반역자가 되어 죽었다.

(중략)

현재의 삶은 비굴의 연속이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어
펼쳐진 하늘을 보지 못한다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 - 비탄 중에서


- 시를 쓸 때 소재는 어떻게 찾는 편인가?
"제 경우엔 한 가지 단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언뜻 떠오르는 단어나 풍경에서 시작해서 늘려나가는 편이에요. '이끼병 민들레'라는 시가 있는데, 그늘이 져 있는 곳에 이끼가 있었고, 들판에는 민들레가 펴 있는 풍경을 보게 됐어요. 이 둘이 서로 만난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 정재훈의 시는 운율을 나누는 것이 굉장히 규칙적이다. 대부분의 시가 한 연에 두 행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면?  
"시란 결국 함축적 언어로 구성된 미시적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를 쓸 때 호흡을 중요시 하는 편이고요. 한 연에 행이 많아지면 읽을 때 숨 가쁜 느낌이 들고 상징성이 함축된 단어를 놓칠 수 있다고 봐요. 이게 첫 번째 이유이고, 짧은 만큼 독자 분들의 몰입을 유도 하여야 하는데, 텍스트가 많이 나열되어 있으면 저의 시를 잘 못 느끼실 것 같아서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단조롭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짧은 시에 특색을 살리기 위해, 같은 단어의 반복이 두 번 이상 들어가지 않고, 직유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징성을 많이 부여해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전혀 연관이 안 되는 것들을 서로 묶는 경우도 많죠. 유성이란 시에 '길 잃은 별 하나 대지의 품으로 안겨 옵니다'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 시를 쓰는 것과 책 작업은 좀 달랐을 것 같은데?
"맞아요. 시를 한 편 한 편 쓰는 것과 시집을 출간 하는 것은 많이 달랐어요. 보니까 제 시에 특히 많이 들어가는 시어들이 많더라고요. 한 편 한 편을 쓸 때는 몰랐는데 전체적으로 모아놓고 보니 확 와 닿았어요. 그런 것들을 많이 삭제했죠. 게다가 제가 띄어쓰기를 그렇게 못하는지 몰랐습니다.(웃음) 어쨌든 이 시는 별로니까 빼자 이런 말 들으면 마음이 좀 아프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
"뭐 주제에는 딱히 연연하지는 않는 편인 것 같고요, 다만 완성도 높은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은 있습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가 있는데,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로 시작하거든요. 훌륭한 시는 언제까지고 씌어지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제 스스로를 울릴 수 있는 시 한편 정도는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100퍼센트 마음에 쏙 드는 시는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

서녘으로 송진 빼앗겨
향 잃은 소나무

민둥산 기슭에
뼈 그늘 드리운다

누굴 가릴 처지가 아닐진대
그림자는 점차 늘어가고

황량한 가지위엔
까마귀만 울고 있다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 - 고독의 풍경 전문


- 현실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자. 등단을 하고, 시집을 냈지만 여전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어떤지?
"직장생활에 큰 미련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크게 힘들지도 않습니다. 제 일의 특성상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는데 재미있어요. 우울증이 낫고 나니까 힘든 것에도 즐거운 것을 찾는 편이 된 것 같습니다. 경치도 많이 보고, 다니면서 시의 소재로 쓸만한 것이 없을까 찾아보기도 하고요. 만약에 저에게 글이 없었다면 이게 굉장히 괴롭고 힘들 수도 있었겠지만 글을 쓰기 위한 재료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일하면서도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 가끔 취미로 활 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는지?
"전혀.(웃음)" 

- 시로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과거 여러 시인들 또한 가난했고 현재도 별 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저는 문학이란 거대한 선물에 저의 삶을 얹어 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괜찮고, 시로 먹고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창공에서 떨어진 물빛
바다로 쏟아져 내리고

사이 파고든 붉은 구슬
거슬러 오른다

어부의 조막배는
뭍으로 머리 돌리고

마중 나간 아내는
언제 오시나 고개 빼든다

사랑방 잠든 아이
배곯아 깨어 우는데

그물이 가벼운 날이라
어부의 어깨가 슬프다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는 꽃잎> - 빈손 전문


- 앞으로의 꿈은?
"많은 분들이 저의 시를 통해 위로 받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쓴 글을 통해 다른 분들이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꿈같은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소설을 쓴 것도 하나 있는데 그걸 출간하고 싶은 마음이 좀 있습니다. 시집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고."

- 마지막으로 정재훈에게 글이란, 시란?
"그때도 지금도 저는 언제나 시인 정재훈으로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글을 쓰기 위해서입니다. 시인이란 영혼에 각인된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쓰고 싶어 쓰는 게 아닌, 쓸 수밖에 없어서 씁니다. 저에게 시란 그런 존재입니다."

쓰고, 또 쓴다. 정재훈을 인터뷰 하면서 이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정재훈은 처음부터 읽히려고 쓰지 않았고, 증명하기 위해 쓰지 않았다. 단지 살기 위해 썼다. 그는 살았다. 자신의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쓴 글이, 이제는 다른 이의 슬픔을 위로한다. 예술을 한다는 건 결국 이런 것이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글을 쓸 것이다.

처음 내면에 집중하던 그의 시는 이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 점점 더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세상으로 정재훈의 시 세계는 점점 확장되고 있다.

그는 여러 지면에도 시를 쓰지만 인스타그램에도 많이 올리고, 많이 지운다. 그 이유에 대해 습작노트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 식의 반응이다. 아이디는 @bard_jeong 이니, 그 아름답고 처연한 시들의 공간을 천천히 둘러봐도 좋겠다.
#그녀의계절에쏟아지던꽃잎 #정재훈 #시인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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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중심으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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