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
박정우
- 시집에 실린 것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는?"솔직히 다 제가 쓴 것들이라서 제일 좋아하는 시를 꼽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쓰면서 가장 공을 많이 들인 시는 '비탄'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세상에 대해서 얘기한 시여서 그런 것 같아요."
행복을 동경하고
슬픔에 공감하며 산다
희망이 있다 부르짖으며
자조하는 얼굴 밑엔
우울이 죄어 오고 있다
머리끝까지 먹혀 버리면
그제야 어른이 되는 걸까
혁명을 부르짖던 자들은
반역자가 되어 죽었다.
(중략)
현재의 삶은 비굴의 연속이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어
펼쳐진 하늘을 보지 못한다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 - 비탄 중에서
- 시를 쓸 때 소재는 어떻게 찾는 편인가?"제 경우엔 한 가지 단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언뜻 떠오르는 단어나 풍경에서 시작해서 늘려나가는 편이에요. '이끼병 민들레'라는 시가 있는데, 그늘이 져 있는 곳에 이끼가 있었고, 들판에는 민들레가 펴 있는 풍경을 보게 됐어요. 이 둘이 서로 만난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 정재훈의 시는 운율을 나누는 것이 굉장히 규칙적이다. 대부분의 시가 한 연에 두 행을 넘어가지 않는다. 이렇게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면? "시란 결국 함축적 언어로 구성된 미시적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시를 쓸 때 호흡을 중요시 하는 편이고요. 한 연에 행이 많아지면 읽을 때 숨 가쁜 느낌이 들고 상징성이 함축된 단어를 놓칠 수 있다고 봐요. 이게 첫 번째 이유이고, 짧은 만큼 독자 분들의 몰입을 유도 하여야 하는데, 텍스트가 많이 나열되어 있으면 저의 시를 잘 못 느끼실 것 같아서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 그렇기 때문에 단조롭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짧은 시에 특색을 살리기 위해, 같은 단어의 반복이 두 번 이상 들어가지 않고, 직유법을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징성을 많이 부여해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전혀 연관이 안 되는 것들을 서로 묶는 경우도 많죠. 유성이란 시에 '길 잃은 별 하나 대지의 품으로 안겨 옵니다'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 시를 쓰는 것과 책 작업은 좀 달랐을 것 같은데? "맞아요. 시를 한 편 한 편 쓰는 것과 시집을 출간 하는 것은 많이 달랐어요. 보니까 제 시에 특히 많이 들어가는 시어들이 많더라고요. 한 편 한 편을 쓸 때는 몰랐는데 전체적으로 모아놓고 보니 확 와 닿았어요. 그런 것들을 많이 삭제했죠. 게다가 제가 띄어쓰기를 그렇게 못하는지 몰랐습니다.(웃음) 어쨌든 이 시는 별로니까 빼자 이런 말 들으면 마음이 좀 아프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작업이었어요."
-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 "뭐 주제에는 딱히 연연하지는 않는 편인 것 같고요, 다만 완성도 높은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은 있습니다. 터키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가 있는데,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로 시작하거든요. 훌륭한 시는 언제까지고 씌어지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제 스스로를 울릴 수 있는 시 한편 정도는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100퍼센트 마음에 쏙 드는 시는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
서녘으로 송진 빼앗겨
향 잃은 소나무
민둥산 기슭에
뼈 그늘 드리운다
누굴 가릴 처지가 아닐진대
그림자는 점차 늘어가고
황량한 가지위엔
까마귀만 울고 있다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던 꽃잎> - 고독의 풍경 전문
- 현실적인 질문을 하나 해보자. 등단을 하고, 시집을 냈지만 여전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어떤지? "직장생활에 큰 미련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크게 힘들지도 않습니다. 제 일의 특성상 부산 전역을 돌아다니는데 재미있어요. 우울증이 낫고 나니까 힘든 것에도 즐거운 것을 찾는 편이 된 것 같습니다. 경치도 많이 보고, 다니면서 시의 소재로 쓸만한 것이 없을까 찾아보기도 하고요. 만약에 저에게 글이 없었다면 이게 굉장히 괴롭고 힘들 수도 있었겠지만 글을 쓰기 위한 재료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일하면서도 여행하는 기분이에요."
- 가끔 취미로 활 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는지? "전혀.(웃음)"
- 시로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과거 여러 시인들 또한 가난했고 현재도 별 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리고 저는 문학이란 거대한 선물에 저의 삶을 얹어 이 아이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괜찮고, 시로 먹고살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창공에서 떨어진 물빛
바다로 쏟아져 내리고
사이 파고든 붉은 구슬
거슬러 오른다
어부의 조막배는
뭍으로 머리 돌리고
마중 나간 아내는
언제 오시나 고개 빼든다
사랑방 잠든 아이
배곯아 깨어 우는데
그물이 가벼운 날이라
어부의 어깨가 슬프다
<그녀의 계절에 쏟아지는 꽃잎> - 빈손 전문
- 앞으로의 꿈은? "많은 분들이 저의 시를 통해 위로 받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쓴 글을 통해 다른 분들이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꿈같은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소설을 쓴 것도 하나 있는데 그걸 출간하고 싶은 마음이 좀 있습니다. 시집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고."
- 마지막으로 정재훈에게 글이란, 시란? "그때도 지금도 저는 언제나 시인 정재훈으로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목적도 글을 쓰기 위해서입니다. 시인이란 영혼에 각인된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쓰고 싶어 쓰는 게 아닌, 쓸 수밖에 없어서 씁니다. 저에게 시란 그런 존재입니다."
쓰고, 또 쓴다. 정재훈을 인터뷰 하면서 이 말이 계속 맴돌았다. 정재훈은 처음부터 읽히려고 쓰지 않았고, 증명하기 위해 쓰지 않았다. 단지 살기 위해 썼다. 그는 살았다. 자신의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쓴 글이, 이제는 다른 이의 슬픔을 위로한다. 예술을 한다는 건 결국 이런 것이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글을 쓸 것이다.
처음 내면에 집중하던 그의 시는 이제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 점점 더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세상으로 정재훈의 시 세계는 점점 확장되고 있다.
그는 여러 지면에도 시를 쓰지만 인스타그램에도 많이 올리고, 많이 지운다. 그 이유에 대해 습작노트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좋아해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 식의 반응이다.
아이디는 @bard_jeong 이니, 그 아름답고 처연한 시들의 공간을 천천히 둘러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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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중심으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전합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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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밖에 없어서 씁니다, 시란 그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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