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환씨가 일하는 밴쿠버의 하이라이즈 콘도미니엄(아파트) 현장.
김병철
책상 의자에서, 마을버스 운전석으로1985년 한주환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무역협회에 취직했다. 서울 강남의 코엑스를 보유한 한국무역협회는 수출기업의 해외시장 개척, 해외홍보 등을 하는 경제단체다. 무역협회를 다니며 이직 한번 안 했던 그는 입사 15년 후인 2000년, 42살에 조기 퇴직을 했다. 아직,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남아있던 시기였다.
- 무역협회에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입사해서 해외시장과로 들어갔어요. 수출 기업의 해외시장 개척을 돕는 부서예요. 1988년 여행자유화 이전에는 여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았어요. 무역협회 추천장으로 여권이 나온 기업을 데리고 외국에 가는 업무를 했죠. 현지 바이어를 모아서 호텔에서 상담회를 열고 국내 기업과 만나게 해주는 거예요. 그때 한 주물업체가 내수에서 30위 밖에 있었는데 싱가포르 다녀와서 8위가 됐어요. 팔자 고친 거죠."
- 꽤 비전있는 부서였을 것 같은데, 왜 퇴사를 하게 되셨어요?"조기퇴직을 안 하면 징계 면직을 시키겠다고 해서 사표 쓰고 나왔어요. 1987년에 무역협회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는데 내가 초대 사무국장이었어요. '강성'으로 찍혀 있었는데 사건이 하나 있어서 건수가 잡혔어요. 무역협회 회장이 관료에서 재벌로 바뀌었는데, 직원 30명을 내보냈어요. 이권이 많았는데 직원들 입 막으려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거죠."
- 40대 초반에 퇴직하면 막막했을 텐데요. 재취업을 고려하지는 않으셨나요?"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사무직으로 출발한 사람은 한번 회사 나오면 패자부활전이 없어요. 경력직을 뽑아주지 않아요. 그래서 식당하다 망하거나 경비하는 거예요. 이민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내 주변을 보면 예전에 종합상사에서 무역했던 사람은 재취업해서 지금도 먹고사는데 나머지는 재취업 못해요. 안 뽑아주니까. 택시 기사도 안 뽑아줘요. 얼굴 딱 보고 대학물 조금 먹어 보이면 골치 아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무역협회 나온 후) 마을버스 기사를 했는데 부사장이 빨리 나가라고 엄청 괴롭혔어요. 대학 나온 것 같다고."
- 마을버스 기사는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캐나다에서 버스 기사하려고 마을버스를 운전했어요. 처음엔 시내버스 회사에 갔더니 사무직 말투가 배어있어서 안 뽑아주는 거야. 그래서 마을버스로 갔어요. 강동 2-1번, 분당 3번, 수지 33번을 운전했죠."
- 마을버스는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노동강도가 세다고 들었어요. 적응하는데 힘들지는 않았나요?"30분 운전하고, 5분 쉴 수 있었어요. 점심엔 15분 딱 쉬어서, 종점 구멍가게나 회사 봉고에서 후다닥 먹어야 했어요. 밥 먹고 배차 간격 맞추려면 빨간 신호를 3개는 지나쳐야 했어요. 일요일은 격주로 쉬어요. 그러면 새벽 4시 반에 운전 시작해서, 월요일 새벽 1시까지 21시간을 쉬지 않고 일하는 거예요.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버스 초보라 사고도 잦았어요. 월급이 약 100만원인데 개인 차보험으로 200만~300만원 나온 거를 막아야 했죠. 눈이 와서 진입로가 얼었는데도 회사에선 무전으로 들어가라고 아우성치고, 차는 브레이크에 발만 얹어도 뒷바퀴부터 흘러 밭으로 빠져들어 가고. 못가겠다고 하면 노선 상무는 그만두라고 소리지르기 일쑤였죠. 사고나면 봉급에서 깔 것이고, 안 가면 잘릴 거고... 칼날 위에 선 무당이었어요."
- 마을버스는 대부분 시내버스 기사가 되기 위해 경력 쌓는 과정이라 처우도 좋지 않다던데요."기사를 사람 취급 안 하죠. 승객이 안 하는 건 당연하고... 어떤 노인은 제 얼굴에 침을 뱉었어요. 참았지요. 이렇게 한 1년 8개월 살았어요. 저는 한국에서 조기퇴직 당하고, 버스운전하면서 고생만 하다 이민 와서 사실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요. 방학 때 애들 데리고 한군데도 갈 수 없었던 시절, 친구들한테 자진해서 전화 안 하고, 안 받던 시절.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