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로부터의 상고법원 입법 추진동력 확보방안 검토.’
법원행정처
청와대를 '설득의 객체'가 아닌 '입법 추진의 주체'로 만들자고 했다. 청와대가 설득을 당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만들자고 했다. 청와대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상고법원을 추진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청와대가 입법 의견을 내도록 유도하자고 했다. 대한변협과 국회는 물론이고 청와대까지 조종할 생각을 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가 사법부 독립을 염원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일이다. 사법부가 대통령과 행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헌법 제102조 제3항)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염원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정반대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대법원의 사법권 남용 혹은 사법 농단 때문에 충격을 받고 있다. 사법부가 행정부의 눈치를 살피느라 소신껏 일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대한변협은 물론이고 국회와 청와대까지 조종하려 했다는 사실에 당혹과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사법부가 무서울 정도로 강해져 있었던 것이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할 정도로 세상이 크게 뒤바뀌었음을 의미하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사자성어를 연상케 하는 격세지감이다.
1987년 6월항쟁 시기까지만 해도 사법부는 군부정권의 눈치를 살폈다. 정치현안과 관련된 재판인 경우에는 청와대의 구체적 지시까지 받았다. 그렇게 사법부가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던 시절에는, 대통령과 행정부 앞에 당당한 사법부를 국민들이 꿈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6월항쟁 승리를 계기로 법치주의 개혁에 힘을 실어줬다. 이 개혁은 항쟁 6년 뒤인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 때부터 본격 추진됐다. 청와대의 입김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 규정에 의해 작동되는 나라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그렇게 분출된 것이다. 신평 경북대 법대 교수의 논문 '한국 사법개혁작업의 평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법개혁은 권위주의 정권이 해체되며 그 후 나타난 정권들의 단골 정책 메뉴가 되어왔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1993년 대법원에 사법제도발전위원회가 설치되었다. ······ 이어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뒤인 1999년, 대통령 소속으로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설립되어 다시 사법개혁작업을 추진하였다. ······ 이어서 노무현 정권이 참여정부를 표방하며 들어서자, 사법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 <세계헌법연구> 제14권 제5호에 실린 논문.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사법부는 행정부에 밀리지 않는 독자적 위상을 구축해 나갔다. 사법권 독립을 위한 법관인사위원회나 판사회의 같은 기구도 이런 상황의 산물이다. 외형상으론 정치와 전혀 맞지 않을 것 같던 이회창 대법관이 국민적 스타로 떠오르며 국무총리에 이어 대통령후보까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볼 수 있다. 사법개혁이 강조되는 동안에는 대쪽처럼 법을 준수하는 인물이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법치주의 개혁에 힘입어 법원뿐 아니라 검찰도 강해졌다. 김의겸·금태섭·이정렬·김선수와의 대담집인 <권력과 검찰- 괴물의 탄생과 진화>에서 최강욱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보안사가 안기부보다 더 세던 군부독재 시절에는 검찰이 힘을 못 가지다가, 형식적인 민주화가 진행되니까 겉으로는 형식적인 법치가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검찰이 전면에 나서게 되고 힘도 갖게 되었다'라고요."
6월항쟁 이후로 법치가 강조되고 검찰이 강해지는 속에서 스타 검사로 떠오른 인물이 홍준표 검사다. 그는 항쟁 이후의 사회 분위기를 활용해, 때로는 검찰 상부의 지시를 무시해가며 전두환 친인척, 노태우 측근, 조폭들을 수사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
국민들이 실어준 힘 악용해 '거대 사법부' 꿈꿔